그대를 보려고 천년을 걸어왔다천태산을 가슴에 품고 걸어온 세월,해마다 천 개의 잎을 피우고천 개의 꽃을 피웠다삼단 같은 머릿결 풀어헤친 폭포를 거슬러 내려온공민왕의 숨결로 황금물결을 불러왔다문무왕 8년 원각대사의 부름을 받은사슴신의 원력으로 지었다는 영국사를 지키려고열두 폭 치마폭에 천년의 별빛을 쏟아놓았다달빛의 언어로 심장은 붉어지고대지의 언어로 나무는 많아졌다.천태산의 새벽은 날마다 새로 태어나는별빛으로 시작되었다밤새도록 새로 태어난 별빛들 걸어 내려와천년나무의 숨결을 열어주었다모든 정령들이 일어나 춤을 추는 시간,바람도 숨죽이
이것은 두 짝, 권력에 관한 보고서이다들었다 놨다를 반복하는 당신은 스킨십을 좋아해자르려는 자와 붙어 있으려는 자의 대립으로 각을 세우고같은 말을 쫑알대는 손가락에 권력이 붙는다살을 섞으며, 당신을 사랑했다뼈를 추리며, 당신을 증오했다같은 동작을 세뇌시키는 당신은뼈대만 남은 마지막 자존심당신의 부름에 암묵적으로 동조한다12월의 볼륨까지는 고백이 필요하다온몸을 좌우로, 상하로 굴곡 있는 성격을 만든다당신의 몸에서 땀방울이 떠나고 있다권력의 잔고가 쌓인다가슴에 왕을 만들 때까지 밥그릇과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 것이다아령을 찌그러뜨리며 근
자연 시간에 살짝 존 시인과 살짝 안 존 시인이 잘 익은 토마토를 앞에 놓고 채소다 과일이다 실랑이가 벌어졌다살짝 존 시인이 모양새로 보나 빛깔로 보나 토마토는 과일이다 우기고살짝 안 존 시인은 토마토는 채소다 분명히 자연 시간에 배웠다 우기고급기야 백과사전을 펼치고 그들에게 씹혀 형색이 모호해진 토마토는 다시 백과사전 티읕 줄 토 자로 돌아가서토마토: 가짓과에 속한 한해살이 채소.키는 1미터이고 잎은 깃 모양으로 겹잎이 어긋나며 여름에 노란 꽃이 잎겨드랑이에 열린다.동글동글한 열매가 붉게 익는데 이 열매는 90퍼센트가 수분이며 카
세 사람이 걸어가고 있었다한 사람에게 세 사람이 필요했다사랑하는 사람과가장 사랑하는 자기 자신과사랑하지 않는 사람이그러지 않으면 자신에게 남은 부드러운 빵을누구에게 주고 싶은지구별할 수 없을 테니까빵의 부드러움을 모르는 한 사람에게도그들은 꼭 셋이어야 했다세 사람이라면한 사람이 함께 있지 않아도외롭지 않을 두 사람을생각할 수 있을 거였다논어 술이편에는 삼인행(三人行)이라는 말이 있다. 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삼인행, 필유아사언, 택기선자이종지, 기불선자이개지). 세 사람이 길을 간다면, 그 중에는 반드시
우리 집 뒤뜰의 우물햇볕이 얼쩡거리는 낮에는구름들이 모여들어 곡예를 하고별들이 바둑을 두는 밤달은 옆에서 훈수 둔다두레박질에 짓궂은 하루가 열린다매일 들여다보는 어머니 거울그 속에 출렁이는 팔남매 얼굴 길어 올리면근육질이 된 어머니 팔뚝에 메뉴가 여문다세상의 찌꺼기 씻어내고 순백이 되라고지칠 줄 모르고 퍼내는 어머니의 화수분우리들의 날갯짓에 북돋움이 되어대전 서울 미국으로 날아갔다등 굽은 두레박이 물을 긷고우리는 냉큼 받아먹기만 했지철분 농도가 짙은 정화수 같은 물 먹고철들지 않고 쇳내 난다고 투덜댔지감사할 줄 모르는 철부지어머니
심장이몸 밖에 달렸더라면네 마음을 더 잘 보았을 텐데뿔이눈 아래에 돋았더라면네가 덜 아프게 찔렸을 텐데그 뿔에손이라도 있었더라면네 상처를 더 어루만졌을 텐데 아니, 생각이나보다 먼저 잠들기만 했어도너와 더 오래 한집에 머물렀을 텐데그 집에바퀴라도 달렸더라면가출하지 않고도 달아났을 텐데그러니까 사랑을볼 수만 있었더라도서로를 안을 때 그리 파고들지 않았을 텐데그랬더라면, 우리도 없었겠지?우리는 너와 나의 불협화음으로 노래하는 존재인지 모른다. 하모니란 바로 그런 것인지도 모를 일. 사랑이란 것도 다 그럴 것이란 생각이 드는데. 그때 좀
감정 카드를 긁었다오늘도 울컥 어제도 울컥, 울컥지지난주엔 거의 폭우였지그래서 물었다이만큼 슬펐으니포인트는 얼마나 쌓였나요창구 직원이 말했다슬픔은 적립되지 않습니다기쁨은 행사 중이고눈물은 한정기간 사용 가능하며분노는 괄호 안에 등록되었습니다그럼 나는 뭘 쌓아왔죠?이 무릎,이 한숨,이말 끝에 맺힌 저 보풀 같은 것들은?그건 보상이 아니라 기록입니다라고 했다적립은 되지 않지만증명은 남아 있다고나는 감정 없는 영수증을 받았다내 슬픔의무적립 내역서그건, 무이자 할부였다인간에 대한 다양한 정의 가운데 평이하지만 그래도 인간을 감정의 동물이라
이따금 수목원에서 나를 잃어버리고 싶다내가 나와 함께 신도시의 산책로를 걸을 때최선으로 단단하게 묶은 새 운동화의 매듭처럼나를 자주 놓치곤 했으며,그것을 알면서도 나는 나를 모르는 체했다마음은 이곳이 아닌 다른 차원에서이제야 겨우 나의 반절만큼 자라난 어린 나에게이유 없는슬픔을 뒤집어쓰게 하고초봄에 내리는 눈은 지난해 흘린 눈물의 양과 닮았다오늘은 눈이 내리지 않을 것이다젊은 시인의 감성이 도드라진다. 이따금 수목원에서 자신을 잃어버리고 싶다고. 자신을 자주 놓치면서도 그것을 모른 체한다고 하니. 자작나무 뒤에 가서 꽁꽁 숨어버리고
늦가을 나무 밑엔빈 손바닥들이 많다남들은 여름 동안 새파란 초록을가득 쥐고 있었다고 생각하겠지만분간 없는 바람을 쥐고있었다고도 하겠지만나뭇잎은 멀고도 먼 곳에서 오는햇빛을 꽉 쥐고 놓지 않았던 것이다여름 거쳐 가을이 오면나무 한 그루 통째로 혼들던그런 힘은 이제 놓치고거느렸던 열매들 모두 거뒤들이고작은 바람에도 갈 듯 말 듯 들썩인다군데군데 벌레 먹은 흔적까지 내려놓는다나뭇가지 사이 각혈 같은 빈손,밤낮 쥐는 일에 열중했던 수작에서 놓여나홀가분할 때도 있다이제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고 여름의 폭염은 저만치 갔는가. 숲으로 가면 여름내
나는 끝없이 굴러온 돌지금 노을빛 바닷가에 섰다짠 눈물에 씻기고 닳아희망의 손길에 이끌려다니다허공으로 흩어진 모래알의 나날그대 햇살로 다가와 토닥이고파도 결을 따라 숨을 고르면젖은 어깨도 서서히 말라갔다출렁임 속 스스로 부딪히며어둠을 익혀 잘 빚어낸 시어어깨에 출렁이는 파도 한 짐 지면내 안으로도 바다가 활짝 열린다둥글다는 것은오래 참고 견뎌낸 모서리다생이 두렵고 가파른 사람은 저 동해나 남해 바닷가로 가보세요. 그곳에 누워있는 돌들은 모두 동글동글 몽돌이지요. 둥근 돌 하나 손안에 쥐어보세요. 포근히 안기는 그 돌과 따뜻한 눈빛
돌아가라 돌아가라펑펑 내리는 눈 맞으며금강에 서면, 고향, 저녁 안개 속으로빈 들녘은 저물어가고, 나는많은 것을 버리며 살아왔지만고향 강만큼 낮게 흐르지 못하고뒷구리 감나무처럼, 허허허굽어웃지 못했다, 슬금슬금완행열차만 서는 곳이지만할머님은 돌아가시고, 객지에서 돌아온경운이형도 다시 객지로돌아갈 채비만 하는 곳잡풀 사이로 부는강바람을 따라, 나는 또어디로 돌아가라고자꾸만 내려쌓이는가눈, 눈, 눈지난주 토요일(9월 6일) 영동문학관 앞에 윤중호 시인의 이 시를 새겨 시비를 세웠다. 윤중호 시인은 1956년 영동군 심천면 심천리 314
아침마다 창가에 쌓인하루살이의 죽음을 본다너무나 가벼워서잡을 수조차 없는 주검,한 점 가벼운 종말을 위해하루를 치열하게 버텼던 생명이다남아 있는 날개 하나말없이 허공 속으로 사라진다하루살이의 죽음 앞에서생명의 끝을 만난다삶이란 끝없는꿈틀거림이란 걸주검이 날아간허공에서 알았다하루살이는 이름에 걸맞게 성충으로 단 하루만 살기도 하지만 평균적으로 2~3일 생존하며, 길면 2~3주, 짧게는 1시간 만에 죽기도 한다. 생을 대부분 물속에서 유충으로 지낸다. 따라서 애벌레 기간까지 포함해 1년가량 산다. 하루살이의 유충이나 아성충에게는 입이
윤기나는 긴 머리생동감 넘치는 근육단력있는 파부미끈한 팔다리 근육지나가는 이들의시선을 모으는 뒷모습사슴같이 달리는모습을 보며나도 저런 때가 있었던가나도 저랬으면 좋을까나는 저걸 부러워해야 할까아, 아니다무엇을 부러워하랴지금이 가장행복한 걸시간을 경험하는 방식은 나를 기준으로 하는 방식이 있고. 대상을 기준으로 하는 방식이 있겠다. 우리는 때로 대상을 통해 자신의 존재론적 성찰에 이른다. 부부가 함께 살아가다 보면 그 사이에서는 늘 같은 보폭으로 시간을 겪기 때문에 나이 듦을 모를 수 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공원에 가서 윤기 나는
길을 짠다그와 나 사이 켜켜이엉켜버린 사연이라는 실타래억측을 부리고 따져내려는 서릿발 언사와너 때문에 나 때문에라고 들이대던 가시 돋친 손가락이감아올린 실올 사이에서 지느러미처럼 미끄러져 꼬리를 감춘다한 코 한 코 뚫고 오르느라 길을 잃은 날개가다듬어진 옹이 무늬에 앉는다카시미론 같은 이해심은 겉뜨기로덜 절은 배추겉잎 같은 오기는 안뜨기로사슬뜨기로 뜬 창살무늬는 코를 지운다대바늘 두 개가 촘촘히 실타래를 끌어 올리는 동안내 탓이야라고 비늘을 털며밑실이 다 풀어졌다따슨 스웨터 하나그에게 걸쳐주니그의 입에서 툭 떨어지는함박꽃 하나키만큼
달빛 잠기어 온 산이 고요한데샘에 비친 별빛 맑은 밤안개바람 댓잎에 스치고비이슬 매화에 엉긴다삶이란 석 자(三尺)의 시린 칼인데마음은 한 점 등불이어라서러워라! 한해는 또 저물거늘흰머리에 나이만 더 차는구나.김호연재는 우리 대전에 연고를 갖고 있는 여류시인이다. 조선시대에 여성이 교육이나 문학활동이 자유롭지 못하던 때에도, 사대부 집안 며느리로 살아가면서 이렇게 탄탄한 작품세계를 구축하고 있다니 놀랍다. 김호연재는 명문 신 안동 김씨 가문의 후손으로 역시 명문가인 은진 송씨 송요화와 결혼하였다. 그리고 유교 사회 조선에서 논란이 될
꽃만 봤지피어나환해지는 것들만 봤지환해서 시린 눈망울눈물 없이 무너지는 것들그래도꽃에만 마음 줬지잎만 헤아렸지떡잎 새잎 반짝이며 돋는연둣빛 별들쏟아 낼 일 모른 척했지꽃빛에 새겨진 눈주름잎맥에 잠간 붉은 혀품었던 기억 떨쳐 내느라가지 끝 살 올리는비정한 마음 듣지 못했지더듬더듬 길을 내는뿌리의 울음흔들리는 땅 밟고 서서나는 자꾸 심장만 들썩였지폭염 속에 땡볕을 밟고 서니 언제 봄이 왔었나 싶다. 초록이 깨어나는 순간의 경이로움이나 감동은 사라지고. 이미 우리는 봄을 깡그리 잊었다. 엊그제 폭우로 난 사태에 사람이 죽고 마을이 묻히기
내 귀를 비우고 싶네.거리의 소리가 너무 높아서진실도 거짓도 알기 어려워내 귀는 쉬고 싶네.내 귀를 이젠 바다를 향한보석함으로 두고 싶네.사람의 파장을 뛰어넘어서다른 떨림의 울림 속에 들어가 살고 싶네.풀잎 사이에 내려놓고풀잎들의 많은 목소리나 듣고 싶네.나무들의 숲으로 가서짐승과 별과 달과 바람이 얼굴 비비며속삭이는 나라의 소리를 듣고 싶네.내 귀를 이젠 비우고 비워서떨리는 사랑의 소리나 가려 듣고 싶네.사람의 나이가 60에 이르면 이순(耳順)이라 했거늘. 듣는 대로 다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인데. 그러니 귀가 순해진다는 것으
내 잎 지고 나면다른 나무 꽃 피고다른 나무 꽃 지고 나면내 나무 싹 돋을 테니슬퍼 마라 이후를지금 아름답게 꽃 필 일지금 아름답게 잎 질 일이다산벚나무꽃 하얗게 산 뒤덮을 때얼마나 황홀했던가저기 저 소나무 이파리는또 얼마나 향기로운가이후를 염려 마라지금 충실히 꽃 필 일지금 충실히 잎 질 일이다‘서시’란 시인들이 서문 대신 쓴 시로 자신의 시와 삶을 두루 아우르는 선언적 의미가 담긴다. 그러므로 ‘서시’에는 그 시인의 세계관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 대표적 예로는 윤동주 시인의 ‘서시’인 바 우리 모두 가슴 저리도록 깊이 간직하고
가만히 문을 밀면수백 겹의 기다림이 밀려온다발효된 기억들이 부풀어 오르고달콤한 은유가 공기 속으로 스며든다밀가루의 우주에 밤이 오면반죽 위에 별들이 은밀히 눈을 뜬다이스트의 숨결이 살아난 어둠 속에서효모는 고독의 문장을 새기며 부풀고오븐이라는 깊은 서가는열기로써 시의 행간을 덥히고무수히 익어가는 빵의 활자는향기로 번지는 생의 서정을 만나반죽은 정성을 기억하고오븐은 땀을 빛으로 환원한다어쩌면 이곳은전쟁 같은 하루에도사람이 사람으로 사는 법을작은 포장지 안에 넣어조용히 건네주는 곳인지도 모른다결국 우리가 돌아가야 할가장 따뜻한 내면의
이것을 이 상자에 넣었으므로 저쪽 상자엔 넣을 수 없지이것이 네 신발이야걷고 뛰어라, 상자가 충분히 커다랗다면 저쪽 세계를기웃거릴 이유가 없지쫓아가는 경찰도쫓기는 도둑도 모두 죽어라 뛰어간다상자를 살짝 흔들면 경찰이 쫓기고 도둑이 죽어라 쫓아간다, 옷만 바꿔 입었을 뿐인데밤이 오면 너는 신발을 성경책처럼 가슴에 품고 잠이 드네내 아기, 세상모르게 잘 자라, 모든 강물이 다 바다로흘러드는데 바다는 넘치는 일이 없단다나는 신발 공장의 일개 노동자새 신발을 새 상자에 넣는 일을 한다네상자 속에, 상자 속에, 상자 속에, 상자 속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