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의 가을밤, 블루체어아트홀의 막이 오르는 순간, 어둠을 가르며 울려 나온 첫소리는 명창 채수정 선생의 목소리였다. 그 울림은 단순히 귀로만 들리는 노래가 아니었다. 긴 세월을 살아내며 삶의 결마다 스며든 숨결이자 인간의 기쁨과 고통을 함께 품은 생의 진동이었다. 마치 깊은 산사의 범종이 새벽 공기를 울리듯 채수정 선생의 소리는 단숨에 청중의 마음을 정좌하게 했다. 그 순간, 나는 판소리가 단지 예술이 아니라 한 인간의 삶을 증언하는 목소리이며 세대를 잇는 기도임을 깨달았다.뒤이어 무대에 선 이는 제자인 함수연 명창이었다. 제자의
가을의 실종을 체감한다. 가을을 품고 단풍의 절정에 이르기 전에 눈이 먼저 찾아온 계절이 되었다. 여름 내 더위와 가을에도 식지 않는 기온으로 있다가 지난 20일에 설악산에 첫눈이 내렸다. 기후와 기온의 상관관계에서 반갑지 않은 가을비가 연일 오다가 갑자기 찬 기운의 변화를 몸소 느끼게 하는 추운 가을이다. 이상 기온으로 준비하지 못한 마음이 더욱 어수선하다.가을 속 변화는 인간의 삶과도 닮았다. 진정한 가을의 아름다움을 누리는가 싶더니 불쑥 찾아오는 원치 않는 온갖 사유로 몸과 마음을 뒤흔든다. 그 과정에서 가을에 나를 찾고 편지
단양 사인암 앞에 서니 세상이 멈춘 듯 고요하다. 절벽을 따라 흐르는 강물은 말이 없고 그 곁의 청련암은 묵묵히 숨 쉬며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나는 그 앞에 조용히 서서 아무 말 없이 한참을 바라본다.나는 늘 무언가를 채우기 위해 바쁘게 살아왔던 것 같다. 시간, 성과, 관계, 욕망. 그러나 채울수록 마음은 가볍지 않았다. 오히려 더 무겁고 복잡해졌다. 청련암의 암벽은 내 안의 혼란을 비추듯 조용히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 앞에서 나는 문득 물었다. 삶은 과연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가.법당을 지나 작은 길을 오르자 바위와 바위 사이에
[충청투데이 김진로 기자] 요즘은 밥 한 끼에도 눈치가 필요한 시대다. 먹고 싶은 것을 고르는 일조차, 함께 있는 사람의 표정을 살피게 되고 ‘이 정도면 괜찮겠지’ 하는 작은 타협이 마음속에서 일어난다.그날도 그랬다. 9월 초, 여름 끝자락의 더위와 가을의 서늘한 기운이 겹치던 저녁. 세 사람은 빗방울이 흩뿌리는 골목의 작은 분식집에 들어섰다. 축축한 공기와 빗소리, 옷깃으로 스며드는 냉기가 마음까지 젖게 했다.지인 둘은 수제비를 주문했고, 나는 김밥을 시켰다. 잠시 후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수제비 두 그릇이 나왔다. 그런데 곧 국
흰 이슬의 백로(白露)가 내일이다. 그러나 여전히 더위는 가시지 않는다. 이 늦여름에 매년 맞는 계절의 현상이 어서 빨리 지나가기를 모두가 희망한다. 작년에는 내가 어떻게 이 계절을 보냈고 견뎌냈는지 의문이다. 올해 태풍 없는 여름과 무더위를 맞았고 처서가 지난 오늘까지도 주야를 가리지 않고 더위는 계속되었다.그러나 9월에는 전혀 달랐다. 하루가 다르게 조석으로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이제사 살 것만 같은 날씨와 기온이 다가왔다. 덥다고 한때는 원망하던 더위도 굳이 보내지 않아도 떠날 때를 아는 이별의 월력이다. 정색을 하며 반기는
신분증 한 장이면 나는 증명된다. 사진, 이름, 번호, 주소. 몇 줄의 정보가 나를 설명하고 사회 속 나를 구별 짓는다. 그러나 그 얇은 카드 한 장이 내 삶의 무게와 고통, 꿈과 흘러온 시간을 다 담을 수 있을까.사회가 인정하는 ‘나’와 내가 아는 ‘나’ 사이에는 언제나 간극이 있다. 신분증은 나를 사회의 일원으로 편입시키지만, 동시에 내 삶의 고유한 결을 지워버린다. 공공기관 창구나 병원 접수대에서 신분증을 내미는 순간 그것은 존재를 인정받기 위한 의식이 된다. 신분증이 없으면 존재해도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된다.신분증 속의 나
8월은 가을로 이행하는 시기이다. 여름 물고추가 어느새 말라 껍질이 쪼그라들었다. 늦여름의 햇살과 바람 때문이다. 어느새 염천의 더위가 슬그머니 휘돌아 꽁무니를 뺀다. 앞마당에 있는 감나무는 말복의 알 빠짐이 잦아들어 이제는 튼실하게 매달려 있다. 나무 사이로 부는 바람은 혁명군의 깃발을 날리듯이 선들거린다.태양에 기초한 24절기 중 8월 초에 입추(立秋), 하순에는 더위가 끝나는 처서(處暑) 절기가 있다. 8월 반절이 지나면 조석으로 바람이 선들하다. 식물들도 모두가 기운을 차리며 제 할 일을 한다. 동부콩은 울타리로 기어올라 알
무대가 어둠 속에 잠긴다. 객석의 숨결마저 고요해지는 그 순간, 한 사람이 조용히 걸어 들어온다.카잘 챔버 오케스트라 지휘자다. 그녀는 단단히 선 채 손끝을 들어 올린다. 공기 속에 쉼표가 그려지고 마침내 음악이 흐르기 시작한다. 단지 ‘공연이 시작되었다’는 사실보다 한 존재가 어떻게 공간과 사람을 이끄는지를 마주하게 된다.무대 뒤에는 모네의 《인상, 해돋이》가 걸려 있다. 연한 붓 터치와 번지는 색감, 형태보다 감정으로 남는 풍경, 그 앞에서 지휘자는 마치 붓을 들 듯 지휘봉을 들어 올리고 손끝으로 오케스트라의 감정을 천천히 데운
아침의 태양이 벌써 붉다. 폭염의 여름, 시기는 장마 기간인 7월이다. 그러나 비가 오지 않는 장마 속 가뭄으로 모두가 비를 기원한다. 지루한 장마가 빨리 끝나기를 바랐던 지난해와 다르게 올해의 여름은 최단기간 장마 일수와 7월의 최고기온을 기록하였다. 점차 변화하는 이상 기후로 여름의 낭만 또한 바뀌었다.비오는 날의 서정이 그립다. 오랜 기간 비가 오지 않아 감성 또한 메말랐다. 가슴에 젖는 소리가 있다. 빗소리의 감성은 무한하다. 70년대 그 시절 호세 페리치아노의 팝의 노래 ‘비(Rain)’를 듣노라면 비의 감성이 밀려온다.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데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 "괜찮아요." "당신은 잘 견뎠어요." 짧고 단순한 말이지만 그 안에는 한 사람의 생을 다 품을 수 있는 따뜻함이 있다.그 말이 진심에서 나왔다면 그 울림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심리학자 칼 로저스는 이를 ‘공감적 인정’이라 했다. 존재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상대의 고통을 말과 태도로 존중하는 것, 그러한 말 한마디는 때로 사람을 살리고 삶의 방향마저 바꿀 수 있다.말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감정의 온도를 전달하는 매개이며,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온기의 선율이다.
노란 감꽃이 지고 난 푸른 유월에 애기 감꼭지가 떨어진다. 꽃잎과 받침으로 감싼 아기감이 초록의 사각 왕관을 닮았다. 자정(自淨)의 낙과(落果)인게다. 뻐꾸기 울고 가뭄의 시절에 유독 떨어짐이 애처럽다. 초여름의 기운으로 무수히 널린 감꽃이 팝콘처럼 쌓였다.대청호로 수몰된 내 고향의 우리집은 감나무집으로 통했다. 세기를 넘어선 수령의 크나큰 감나무로 여름이면 그늘을 만들고 초겨울까지 계절별로 우리들에게 이로움을 주었다. 특히 감꽃과 목걸이, 감잎차와 홍시의 기억은 유년 시절의 재미와 행복이었다. 46년 전 아버지는 전에 살던 집이
청주 부모산 정상에서 자주 고요한 손길과 마주친다. 낙엽을 걷고, 메마른 나무에 물을 주며, 때로는 묘목을 심기 위해 땅을 일구는 그 손길. 처음엔 그저 부지런한 산 사람의 일상이라 여겼다. 자연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일쯤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날, 분홍빛 비닐봉지에서 홍매화 묘목을 꺼내 조심스레 심고 흙을 다지던 그녀를 가까이서 바라보며 나는 알게 되었다. 이 산에 숲이 자란 건 단지 자연의 섭리만은 아니었다. 조용한 손길, 이름 없는 헌신이 켜켜이 쌓여 이뤄낸 기적이었다.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는 사람』에 나오는 엘
녹색 문을 열고 맞은 계절의 오월이다. 사월이 꽃 마중이라면 오월은 신록 그 자체이다. 장미는 가시를 세울 시기에 가장 정열적 황홀함을 안긴다. 오월의 꽃 장미와 아카시아, 찔레꽃이 꽃향기를 내품는 청초한 하늘이 우리를 부른다. ‘오월이 오면 엄마 손잡고 들로 가요’라는 시적 표현과 어릴 적 순수한 마음의 봄을 맞았던 시절이 그립다.누구나 추억을 더듬는 가슴앓이와 세월의 뒤안길을 거슬러 오월이면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다. 슬프거나 기쁘거나 수많은 사연을 담은 인생사는 모래알 같은 드라마 속 기억이다. 푸른 꿈의 청춘과 화양연화 같았던
아버지는 병원이 아닌 집에서 병마와 조용히 싸우셨다. 고통을 숨긴 채 묵묵히 일상을 견뎌내셨다. 그러던 어느 12월의 추운 아침, 화장실을 다녀오신 뒤 조용히 스러지셨다. 창밖의 바람은 살을 에었고, 방 안의 공기마저 숨 막히도록 싸늘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아버지와 이별을 마주해야 했다.아버지의 유학 시절 사용하셨던 낡은 가죽 가방 안에는 열 권이 넘는 수첩이 보관되어 있다. 손때 묻은 그 수첩들엔 당신이 남긴 삶의 기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조용한 목소리처럼 담백한 글귀들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따뜻하다. 그 문장 하
봄이 변덕이다. 3월 희망의 계절을 지나 4월은 꽃의 향연을 누리는 달이다. 그만큼 겨울을 지난 생명력으로 산하의 화초들이 꽃을 피워 일어서는 시기이다. 매화를 지나 벚꽃은 바람결 유혹으로 낭만적이다. 노랗고 밝은 채색의 꽃 속에서 자란 연두 잎새가 애처롭기도 하다.우리가 봄의 찬 기운으로 춥다고 움츠릴 때 어느새 봄은 지나간다. 언제 올지 모를 변화는 인간사에서도 마찬가지로 스친다. 지난 13일 ‘4월 중순 첫눈’의 지표로 1907년 이후 118년 만에 4월의 눈이 내렸다. 대기 상층으로 -30도 이하의 찬 공기가 지나 대기가 불
[충청투데이 김진로 기자]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시선 속에서 살아간다. 버스를 기다리고 스마트폰을 보는 순간에도, 카페에서 창밖을 바라보는 순간에도 우리는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눈길을 스친다. 그것이 의식적인 것이든, 무심한 것이든,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일상을 이어간다. 그런 시선들은 때로는 우리를 지나치지만, 어느새 우리 안에 스며들어 우리의 모습을 빚어낸다.청주시립미술관의 전시 ‘The Observers Are Observed (정찰된 위성들)’은 이러한 시선의 교차를 탐구한다. 그중에서 민성홍과 안효찬 작가의 작품은 우리가
3월은 봄이다. 그러나 봄 속 꽃샘추위로 움츠리게 하는 계절이다. 한겨울 추위는 당연히 받아들이지만 봄 추위는 싫게만 느껴진다. 시베리아 고기압의 남하 변동에 따른 온난기단과 세력 다툼으로 봄 마중에서 늦추위가 발생한다. 그래도 봄은 봄이다. 봄바람 속에 품은 온기는 비가 내릴수록 따뜻해진다.현 세태에 대한 암울 속에서 화한 희망 같은 기대감이 곧 추위에서 따스한 햇빛으로 변하는 봄에 비유해본다. 이렇게 우리 모두는 새봄을 맞이하는 약동과 희망, 새롭게 변하는 세상을 기다리고 있다. 경칩을 지난 개구리가 도약을 하듯 변화 속에서 제
훈이 커튼 가게로 들어선다. 그곳은 부부의 정성이 깃든 작은 우주다. 사장님은 시공을, 사모님은 재봉을 맡아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작품을 만들어 낸다. 나는 조심스럽게 내 마음에 걸려 있던 커튼 이야기를 꺼낸다.작년 여름, 나는 12폭 모시 치마를 뜯어 능소화를 그리고, 오래된 삼베 이불을 잘라 질경이와 야생화를 그렸다. 그것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었다. 나의 기억과 사유, 시간과 감정이 천 위에 전이된 것이었다. 부부에게 그림이 그려진 삼베와 모시를 커튼으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며칠 후, 내 마음의 커튼이 완성되었다. 치맛자락을
노란 꽃이 앙증맞다. 가여워서 보는 눈이 처연하다. 눈 속에 핀 연꽃 같다는 설연화(雪蓮花)의 꽃 이름 복수초이다. 몇 해 전 이른 봄맞이 모임을 광릉수목원에서 하였다. 철책 속 양지바른 낙엽 속에서 핀 황금색 잔 같은 봄꽃. 한자로는 복 복(福) 자에 목숨 수(壽) 자이며 ‘영원한 행복’의 꽃말이다.긴 겨울 끝 2월 이른 봄에 맞았던 복수초는 반가움 속에서 귀엽고 화사한 모습이 매혹적이다. 꽃을 본 마음 속 감흥이 첫 연애 같았다. 새로운 것과 마주하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싶다. 그러나 실제의 봄을 맞기 전 우리네 마음에는 벌써
새벽 산행에 도전이다. 어둠 속을 걷는다. 작은 빛을 따라 한 걸음씩 내디딘다. 문득, 바다의 ‘집어등’이 떠오른다. 바다의 어두운 밤, 집어등은 물고기들을 유인하는 불빛이다. 어부들은 그 작은 불빛을 의지해 조업 하고, 모여든 물고기들은 결국 어망에 갇히고 만다. 나는 휴대전화 조명을 따라 산길을 걷는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이 어둠 속에서 빛이 인도하는 방향대로 발을 옮기고, 그 작은 불빛만을 의지해 걸음을 내디딘다.빛을 따라 오르다 보니 혹시 이 빛도 나를 어디론가 유인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어둠이 짙을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