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미란 수필가
[충청투데이 김진로 기자] 요즘은 밥 한 끼에도 눈치가 필요한 시대다. 먹고 싶은 것을 고르는 일조차, 함께 있는 사람의 표정을 살피게 되고 ‘이 정도면 괜찮겠지’ 하는 작은 타협이 마음속에서 일어난다.
그날도 그랬다. 9월 초, 여름 끝자락의 더위와 가을의 서늘한 기운이 겹치던 저녁. 세 사람은 빗방울이 흩뿌리는 골목의 작은 분식집에 들어섰다. 축축한 공기와 빗소리, 옷깃으로 스며드는 냉기가 마음까지 젖게 했다.
지인 둘은 수제비를 주문했고, 나는 김밥을 시켰다. 잠시 후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수제비 두 그릇이 나왔다. 그런데 곧 국물이 반쯤 담긴 또 하나의 수제비 그릇이 우리 앞에 놓였다. 의아해하는 우리에게 사장님은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김밥엔 원래 국물이 따라야 하잖아요. 그냥, 수제비 국물 좀 드셔보시라고요."
부탁한 적도, 값을 치른 것도 아니었다. 그저 설명 없는 마음의 건넴이었다. 순간, 수제비 국물의 온도는 달라졌다.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속을 데워주는 배려였고, 말 없는 다정함이었다.
음식의 온도는 불의 세기나 조리 시간에서만 생기지 않는다. 그것은 음식을 내어주는 사람의 태도에서, 눈빛에서, 식탁을 사이에 한 침묵 속에서 전해진다. 그날의 밥상은 조용히 그러나 깊이 진심을 전해주었다.
식사가 끝날 무렵, 사장님은 다시 다가와 시래기 무침 한 접시를 내어주었다. "가족들 먹으려고 만든 건데요, 그냥 조금 드셔보세요." 짭짤하고 고소한 맛보다 먼저 스며든 것은 마음이었다. 반찬 하나에도 정성이 담길 수 있고, 음식이 허기를 넘어 삶을 건네는 방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래 지나도 그 밥상은 선명하다. 수제비의 구수한 국물도, 시래기의 정갈한 맛도 좋았지만, 더 깊게 남은 것은 사장님의 태도였다. 말은 적었으나 손길은 정겨웠고, 미소는 작았으나 마음은 넉넉했다.
음식에는 저마다의 온도가 있다. 그것은 조리법보다 마음에서 비롯된다.
누군가의 손길이 진심을 담을 때, 음식은 단순한 맛을 넘어 마음을 데운다. 그래서 국물 한 그릇은 위로가 되고, 반찬 한 접시는 살아갈 힘이 된다.
돌아오는 길, 문득 생각했다. 우리 모두에게는 저마다의 온도를 지닌 음식 한 그릇이 있지 않을까. 어린 시절 어머니가 내어주시던 밥 한 끼, 지친 하루를 붙잡아주던 국물 한 모금, 말없이 건네던 누군가의 손길. 그 온기를 품고 우리는 오늘을 살아간다.
그리고 다짐해 본다. 언젠가는 나도 누군가의 하루를 데워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말보다 먼저 온기가 전해지는 그런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