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미란 수필가
단양 사인암 앞에 서니 세상이 멈춘 듯 고요하다. 절벽을 따라 흐르는 강물은 말이 없고 그 곁의 청련암은 묵묵히 숨 쉬며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나는 그 앞에 조용히 서서 아무 말 없이 한참을 바라본다.
나는 늘 무언가를 채우기 위해 바쁘게 살아왔던 것 같다. 시간, 성과, 관계, 욕망. 그러나 채울수록 마음은 가볍지 않았다. 오히려 더 무겁고 복잡해졌다. 청련암의 암벽은 내 안의 혼란을 비추듯 조용히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 앞에서 나는 문득 물었다. 삶은 과연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가.
법당을 지나 작은 길을 오르자 바위와 바위 사이에 숨듯 자리한 삼성각이 있다. 일부러 찾지 않으면 지나치기 쉬운, 자연이 감춰둔 듯한 공간이다. 삼성각은 산신, 칠성, 독성이라는 세 신을 모신 곳으로 각각 삶의 방향, 운의 흐름, 내면의 단단함을 상징한다. 나는 조용히 신발을 벗고 들어섰다.
삼성각 안은 말이 없었다. 침묵 속에 고요한 숨결이 머물고 있었다. 나는 심신을 가다듬고 마음의 문을 열었다. 채우기 위한 간청이 아니라 비우고 내려놓는 기도를 올렸다.
산신 앞에서 내가 어디쯤 와 있으며 어디로 가야 할지를 되짚어보았다. 불안과 조급함을 내려놓고 나서야 삶의 방향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칠성 앞에서는 멈추는 법을 배웠다. 기회는 늘 곁에 있었지만, 멈춰 서야만 비로소 보였다. 독성 앞에서는 진짜 나를 마주했다. 비교, 두려움,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결국 내가 쥐고 있던 환영(幻影)이었다.
기도 중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자세는 내 안의 조급함을 내려놓는 하나의 몸짓이다. 그것은 스스로를 다시 바라보게 하는 고요한 시작이다. 삶을 가볍게 만드는 건 더 많이 갖는 데 있지 않다. 쥐고 있던 것을 놓는 데 있다. 성장은 어쩌면 그렇게 하나씩 비워가는 데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기도를 마치고 마당으로 나왔을 때 햇살이 바위틈을 타고 조용히 내려앉고 있었다. 그 빛은 오늘이 처음인 듯 내 마음에 닿았다. 멈추고 비운 마음으로 바라보니 익숙한 풍경도 낯설게 빛났다. 바뀐 건 세상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나였다.
비우고 나서야 비로소 보인다. 그것은 자연의 이치이자 마음의 법칙이다. 삶은 채우는 일보다 비우는 일에서 깊어진다. 길을 묻기보다 걸음을 멈추는 용기, 행복을 좇기보다 고요를 허락하는 지혜. 그것이 청련암이 내게 가르쳐준 진짜 수행이었다.
나는 다시 삶으로 돌아간다. 더 많이 가지려는 마음보다 놓지 못하는 마음이 삶을 무겁게 만든다는 걸 기억하며. 이제는 덜 채우고, 더 비우며 살아가리라.
비우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그것은 결국 나 자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