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미란 수필가

청주 부모산 정상에서 자주 고요한 손길과 마주친다. 낙엽을 걷고, 메마른 나무에 물을 주며, 때로는 묘목을 심기 위해 땅을 일구는 그 손길. 처음엔 그저 부지런한 산 사람의 일상이라 여겼다. 자연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일쯤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날, 분홍빛 비닐봉지에서 홍매화 묘목을 꺼내 조심스레 심고 흙을 다지던 그녀를 가까이서 바라보며 나는 알게 되었다. 이 산에 숲이 자란 건 단지 자연의 섭리만은 아니었다. 조용한 손길, 이름 없는 헌신이 켜켜이 쌓여 이뤄낸 기적이었다.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는 사람』에 나오는 엘제아르 부피에는 말없이 나무를 심으며 황폐한 땅을 푸른 숲으로 바꿔낸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오랜 세월 묵묵히 이어온 그의 신념은 결국 마을을 되살리고 사람들의 삶을 회복시킨다. 그는 전쟁보다 강한 생명의 신념으로, 말보다 뿌리 내리는 행동으로 땅을 치유한 사람이다.

내가 부모산에서 만난 그녀도 그런 사람이었다. "꽃과 나무는 혼자 보기보다 여럿이 함께 볼 때 더 좋잖아요." 그녀의 말은 소박했지만 나눔과 배려에 뿌리를 둔 철학이었다. 열매를 사람들이 따 가도 아깝지 않으냐는 질문에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먹으라고 심은 건데요. 따 가면 더 좋죠." 그 말엔 자연의 넉넉함이 배어 있었다. 사람들이 묘목을 뽑아가는 일도 있다고 했다. 한참을 키운 목단이 사라진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담담히 말했다. "괜찮아요. 뽑히면 또 심으면 되죠." 그 말은 체념이 아니라, 사라짐마저 품어 안는 신뢰와 순응의 태도였다.

그녀는 단지 나무를 심는 것이 아니었다. 타인을 위한 공간을 만들고, 숲을,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돌보고 있었다. 그 손길은 말없이도 사람을 움직인다. 때로는 그 침묵이 가장 깊은 울림이 되기도 한다.

산길을 내려오며 문득 나의 삶을 돌아본다. 내가 하는 문학 치유 역시 그녀의 손길과 닮았다. 글을 쓰고 이야기를 건네는 일, 그것은 누군가의 마음 밭에 조용히 씨앗 하나를 심는 일이다. 눈에 띄지 않고, 금세 열매를 맺지도 않지만 언젠가 그 씨앗은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고, 작은 꽃을 피울 것이다. 누군가는 그 꽃 앞에서 웃음을 되찾고, 또 다른 이는 그 그늘에서 잠시 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말없이 나무를 심는 사람. 조용히 마음을 심는 사람. 그들의 손길은 소리 없이 세상을 지탱한다. 나도 그처럼, 글이라는 씨앗을 심는 사람이 되리라. 글을 통해 누군가의 마음속에 조용한 숲 하나, 그늘 하나를 만들어주는 사람. 언젠가 그 글들이 자라나 세상에 작지만 깊은 쉼과 울림으로 남기를 조용히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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