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렬 청주대·한국음식인문학 연구원장

지난해 입동을 조금 지난 무렵 금강 유역 음식문화 조사차 양산팔경 지역에 갔을 때의 일이다. 겨울의 문턱에 들어섰으므로 넓은잎나무 단풍의 절정기는 지나버렸지만 비단강이 빗겨 흐르는 강선대 절벽 위 소나무잎은 더욱 푸르게 느껴졌다.

함벽정 가는 길 뒷골마을 쪽에서 왁자한 소리가 들려 따라가 보니 한 농가에 대여섯 사람이 모여 김장이 한창이었다. 평상 위에는 물기를 빼느라 절인 배추가 쌓여있고 허리 굽은 노모는 고춧가루, 마늘, 생강, 채 썬 무와 갓에 찹쌀풀 등이 담긴 빨간 플라스틱 통에 젓갈을 조금씩 넣어가며 김칫소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마당 한쪽 화덕 가에서는 아침 일찍 도착했다는 아들 내외와 이웃 마을로 시집갔다는 딸이 수육 삶는 법을 서로 다투고 함께 온 손주들은 이리저리 뛰어노느라 바빴다.

노모 곁에 붙어 어떤 젓갈을 쓰는지? 배추김치 외에 또 다른 어떤 김치를 담는지? 이것저것 묻고는 사진 몇 컷을 찍고 돌아 나오려는데 언제 준비했는지 플라스틱 통이 담긴 검정 봉투를 불쑥 내미신다. "이거 어제 미리 담가 둔 파김친디 한 통 담았으니 가져가유." 계속 길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었으므로 결국 사양하고 나왔지만, 여행 내내 마음이 따뜻했다.

속리산 법주사에는 깊이와 지름이 2미터가 넘는 커다란 석옹이 있다. 신라 성덕왕 대인 서기 720년 전후에 만들어져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절임 채소 저장 독으로 알려진 이 돌항아리는 당대 3천여 명을 넘었다는 법주사 승려들의 겨울철 먹거리로 채소를 절여 저장하던 것이다. 긴 세월 동안 사용하지 않던 것인데도 소금기가 검출된다고 하니 오랫동안 김치와 절임 채소를 보관하는 데 쓰였음이 분명하다.

가족은 물론 이웃까지 함께 모여 긴 겨울 동안 두고 먹을 김치를 담는 일은 그저 먹거리를 마련한다는 차원을 넘는 축제이자 의식 같은 전통문화이지만 이제는 서로 모여 김치를 담는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고 어머니와 그 어머니의 어머니들이 일상으로 담고 먹어 온 김치 만들기는 따로 배워야 하는 특별한 기술이 되었다.

그래도 금강 주변 들과 골짜기에는 천년이 넘는 김칫독과 길고 긴 식문화를 끈기 있게 이어가는 속 깊은 충청도 사람들이 살고 있다.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