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형(한동대 국제지역학과 국제정치학 교수·전 국립외교원장)

같은 현상을 보고도 정반대의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을 설명할 때 자주 인용하는 비유가 바로 절반이 채워진 물컵에 대한 관점의 차이다. 어떤 이는 절반이나 남았다고 생각하는 반면, 다른 사람은 절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후자가 가진 부정적 관점보다는 전자처럼 긍정적 사고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다양한 국익이 치열하게 충돌하는 외교의 현장에서 물컵 반 잔에 대해 막연하게 그리고 기대와 희망만으로 사고하는 것은 국익을 그르치는 지름길이다.

지난 3월 윤석열 정부는 일제에 의한 강제 동원 희생자들에 대해 우리 측의 양보만만을 담은 해법을 발표하면서 물컵 비유를 사용했었다. 일방적이고 굴종적인 방안을 두고 박진 외교부 장관은 한일관계 개선을 위해 우리가 먼저 물컵의 반을 채웠으니 나머지 절반은 일본이 채울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일본 정부는 그런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당시 끓어올랐던 국내 여론을 모면하기 위한 변명에 불과했거나, 아니면 근거 없는 희망사고를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일본이 나머지 반을 채우는 성의를 전혀 보이지 않았고, 향후도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주고받는 것이 외교의 기본이지만, 일방적으로 내어준 외교의 전형이었다. 반대로 지금까지 강제 동원에 대한 사과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기시다 총리를 비롯한 일본 지도급 인사들의 야스쿠니신사 공물 봉납과 참배로 물잔에 재를 뿌렸다. 교과서와 위안부, 그리고 독도문제에까지 더 노골적이고 과감해지고 있다. 그런데도 윤대통령은 최근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회의(APEC)에서 기시다에게 한일관계가 100% 완벽하게 회복되었다고 자평했다.

일본은 잔을 채우지 않는데, 한국은 그런 일본을 대변하고 역성을 들었다. 지난 9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제54차 유엔인권이사회에서 과거사 문제와 관련 윤석열 정부가 제출한 의견서에 "현재 진행 중인 과거사 문제를 정부가 대부분 해결했거나 해결하고 있다."라고 했고, "일본 정부는 위안부 피해자들과 강제 동원 피해자들에게 공식으로 사과하고, 가해 사실을 인정했다."라는 왜곡에 가까운 내용까지 담았다. 게다가 윤석열 정부는 강제 동원 일방적 해법을 발표한 이후 국내의 반대 목소리에 대해 "작금의 엄중한 국제정세를 뒤로 하고 적대적 민족주의와 반일 감정을 자극해 국내 정치에 활용한다"라고 비난하고, 이를 내버려 둔다면 대통령으로서의 책무를 저버리는 것이라 강변했다. 과연 그럴까? 국민이 정치적 악용을 하는 것이 진실일까? 아니면 윤대통령이 국내 정치에 이용하는 것이 진실일까?

윤석열 정부는 가치 외교로 포장하지만, 실제로는 이념편향 외교다. 윤 대통령이 가치를 들먹일 때는 대외적으로는 중국, 북한, 러시아를 욕할 때만, 그리고 국내적으로는 전임 정부, 야당, 노동계, 진보 시민단체를 적대시할 때만 선택적으로 사용한다. 세상을 선과 악으로 나누고, 선이 악의 세력을 궤멸시켜야 한다는 극우적 세계관으로 미국의 네오콘과 일본 극우와 유사한 세계관을 노골적으로 보인다. 자유, 인권, 민주주의로 대표되는 가치는 우리가 마땅히 추구해야 하지만, 외교 무대에서 진영을 가르고 적대적인 관계를 구축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잘못이다. 지난 30년간 개방형 통상국가로서 대륙으로 진출해서 황금시대를 열었고 보수·진보정권 할 것 없이 열린 다자외교의 지향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오늘날 대한민국이 있다. 그러나 진영 외교에 매달리는 윤정부로 말미암아, 국익 추구는 사라지고, 한국은 이제 국제 외교 무대에서 더 이상 변수로서 역할을 상실했다. 한·미·일 관계 역시 한국은 평등한 플레이어가 아니라 하부구조로 편입되고 있으며, 군사전략 및 지정학적으로 하부구조거나 전위대 역할로 세팅되고 있다. 3국의 안보협력과 동맹은 질적으로 다르다는 반박에 대해서는 안보협력의 경계선이 희미해지는 동시에 확대된다면 실제적인 동맹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매우 크며, 우리가 부정한다고 해도 주변국은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김대중 대통령이 어렵게 축적한 화해협력과 주변국 외교의 공든 탑을 일시에 무너뜨려 버렸던 것처럼 윤석열 정부는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평화프로세스를 철저하게 무력화시켜버렸다. 평화는커녕 군사 충돌의 위기가 고조시켰으며, 비현실적인 북한 붕괴론으로 회귀했다. 문제는 북핵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하면서 남북관계의 악화는 방치하고 있다는 데 있다. 윤정부는 일본 정부의 충실한 변호사의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다. 한일관계는 철저하게 기울어진 관계로 고착되고, 일본에 과거사에 대한 면죄부를 제공한다. 강제 동원을 포함한 과거사, 독도문제, 수출규제 등에 대한 일본의 책임론 희석하고, 일본의 군사 대국화를 기정사실로 만들었다. 일본은 오염수와 영토 문제에서 우위를 점했다고 여기고 쟁점화와 압박을 지속할 것이다.

윤석열 정부 1년 6개월 외교로 국익은 실종되고, 미·일에는 굴욕의 관계로 가고, 북·중·러와는 적대의 관계로 빠져들고 있다. 외교·안보의 사령탑인 국가안보실은 미국이 도청을 사실상 시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말의 항의나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도 없다. 우리 기업들이 미국에 133조를 투자하고도 미국 정부의 반도체와 배터리 정책에서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중국의 가장 민감한 대만 문제를 건드려 관계 악화를 자초하고, 우크라이나에 살상 무기를 지원할 수도 있다면서 러시아와의 관계를 위험에 빠뜨렸다. 한반도평화라는 가치는 가짜로 몰아붙이고, 전쟁 불사론과 선제타격론으로 한반도의 긴장을 고조시킨다. 시간이 갈수록 극우화하는 윤 대통령에게서 트럼프의 모습이 자주 투영된다. 국내외에서 적군과 아군을 철저하게 분열한 다음, 지지자들을 위한 정책으로 정치적 결집을 구축하고 권력을 유지하는 패턴이다. 대한민국이 이념 외교에 덫에 걸려 한반도평화는 위협받고, 동북아의 안정은 흔들리며, 세계평화는 멀어지고 있다.

글을 시작하면서 던졌던 물컵 반 잔의 진실은 무엇인지 되물어보자. 반 잔은커녕 한국 외교의 컵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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