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희 대전문화재단 예술지원팀장

지난달 25일은 대전에서 활동했으며 근대동양화 6대화가로 알려진 심향 박승무 선생이 타계한지 43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당일 심향 선생을 추모하기 위한 43주기 심향 추모제가 대전지역 미술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중구에 위치한 심향 박승무 선생 묘에서 진행됐다. 심향 선생 탄신 130주년 기념 ‘심향맥전’도 지난달 25~30일 대전예술가의집에서 진행되기도 했다.

심향 박승무 선생은 1893년 8월 25일 충북 옥천에서 출생했다. 1913년 서화미술회 강습소에 입학해 조석진과 안중식 등에게 그림을 배웠다. 1921년 고희동(高羲東) 등이 주도하는 서화협회 회원이 돼 협회전람회와 초기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했다. 1949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가 시작돼 제1~3회 추천작가, 제4회 초대작가로 선정됐으나 국전의 문제점을 들어 한 번도 출품하지 않았다. 심향 선생을 주목하는 이유는 미술계에서는 명성있는 화가로서 잘 알려져 있지만, 독립운동가로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것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다.

심향 선생은 개인적으로 불우한 삶을 살았다. 그런 연유인지 심향 선생은 잃는다는 것에 대한 생각이 남달랐다. 평범한 화가로서가 아닌 시대상황에 맞는 특별한 인생의 길을 걷게 된 것 같다. 심향 선생은 일제강점기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해 1917년 중국 상해로 건너가 미술작품을 팔아 독립자금을 마련하는 방법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충북 옥천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규홍과의 만남을 통해 독립자금을 모으는데 일익을 담당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1920년 심향 선생은 일경에 의해 체포돼 부산항을 거쳐 고향인 충북 옥천으로 압송되었고 2년간의 감시와 연금하에 지내게 된다. 경찰의 감시망이 풀리자 심향 선생은 경성으로 가서 그림 공부를 했지만, 독립운동에 마음이 쓰여 다시 만주로 가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심향 선생은 ‘나라를 바로 세워야 하고, 나라를 바로 세우려면 힘을 키워야 한다. 그 힘은 배움에 있다’는 생각에 잠겨 있던 분이었고, 그 뜻에 따라 행동했다. 한국전쟁 당시 대전에 잠시 머문 것이 인연이 돼 1957년부터 여생 23년을 줄곧 대전 대흥동에서 외롭고 곤궁한 화필 생활을 하면서 만년을 보내다가 1980년 7월 25일 세상을 떠났다.

선생의 화풍은 전통적 산수화로 전통양식에 따른 부드럽고 소박한 겨울풍경과 현실감 있는 우리 생활 주변 풍경을 주로 그렸다. 대표작으로 설경산수(1967), 춘경산수(1967), 춘색유촌(1968), 추경산수(1976), 하경산수(1976) 등이 있다. 예술가의 작품에는 그 사람이 살아온 시대, 환경과 배경 등 정체성이 드러나야 한다. 심향 선생은 "자극적인 소리와 색으로부터 정신의 그윽함과 고요함을 잃게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은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 그래야 그림에서 감동이 나올 수 있다"고 했다.

이렇듯 심향 선생은 깊고 고요한 시대정신으로 살다 간 예술가였다.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