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옥 수필가

온천지가 꽃이다. 어스름 달빛 아래로 살구꽃이 피어나고 눈 부신 햇살 사이로도 제비꽃은 피고 있다. 겨우내 꽁꽁 닫고 있던 대지의 빗장을 활짝 열어젖히고 여린 생명은 큰 힘으로 불쑥 솟아났다. 나지막한 산마루에서도, 높다란 구릉에서도 새 생명이 초록의 촉을 세우고 꽃으로 환하게 피어나니 신비한 생성의 물결이 온 세상에 출렁인다. 꽃이 피어난 곳마다 각양의 향기를 분분히 날리며 봄의 완연함을 알린다.

만화방창 절기 속에 심신을 진탕 빠져보려 떠들썩한 상춘객들의 무리 속으로 나를 던졌다. 화무십일홍이라 했던가. 무더기를 이루며 앞다투어 피어나던 꽃송이들이 그새 하나둘 땅으로 떨어져 더러는 바람결에 날리고 더러는 사람들의 발길에 차여 무심하게 짓밟히고 있다. 떨어진 꽃 한 송이를 집어 들어 손바닥 위에 올리고 가만히 들여다봤다.

봄은 그냥 그렇게 왔다 또 이렇게 그냥 가는 걸까. 아니다. 그냥은 아닐 것이다. 눈이 부시도록 찬란한 꽃들이 봄이 되면 그냥 피어나는 것도, 짧은 절기를 지나 서둘러 가버리는 것도 결코 그냥은 아닐 것이다. 짧은 봄의 향연이었지만 한 송이 꽃을 피우기 위한 각고의 애씀이 얼마만큼 있었을까. 잎새 떨군 앙상한 나목으로 견뎌낸 시간은 삶의 쉼 없는 여정이었고 끊임없는 노고였다는걸 왜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을까. 눈이 부시게 화려한 봄꽃들이 내게는 그냥 즐기는 짧은 향연이고 그저 아름다운 풍광이었지만 누군가에겐 치열한 삶의 터전이며 고단함이 진득하니 묻어난 자리란 걸.

작은 풀꽃 한 송이를 피우기 위해 혹독한 눈보라도 안으로 품으며 숱한 날들을 고독하게 견뎌냈으리라. 인고의 시간이 모여 한 떨기 꽃으로 피워냈으니 시든다 한들, 떨어진다 한들 어찌 꽃이 아닐까. 어떤 조건에서도 순리를 거스르지 않고 때가 되면 어김없이 피워내는 작은 풀꽃 한 송이도 어찌 위대하다 하지 않을 수 있을까.

변모하는 계절의 절경에 흠뻑 빠지면서도 때가 되면 그냥 꽃이 피고 잎새가 돋아나며 열매를 맺는 거라 무심했다. 꽃 한 송이 피우고 꽃 진자리마다 열매를 맺기까지 또 땡볕 아래서 얼 만큼 참아내고 견뎌야 성숙의 계절을 맞이하는 건지. 세상살이 또한 그냥 이뤄지고 계절 또한 그냥 변모하는 건 하나도 없나 보다. 자연 속에 묻혀 더불어 살면서도 계절의 변화에 무심했던 소견이 이 봄날 꽃 한 송이 앞에서 한없이 겸허해진다. 만개의 황홀한 향연과 그윽한 향기를 쫓다가 시들어지면 돌아서 쉽게 잊어버리던 나의 이기심이 부끄럽다. 이 세상 빛나는 꽃들도 젖고 젖으며 따뜻한 꽃잎이 되었다며 흔들리지 않고 피어나는 꽃이 어디 있겠냐던 어느 시인의 감성이 되어 떠나는 봄을 향해 가만히 속삭인다. 그래서 위대한 봄이 그냥, 마냥 좋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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