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옥 수필가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삼월의 봄 햇살은 투명하다 못해 눈이 부시다.

정오가 가까워서야 커피 한 잔과 푸석한 식빵 한 조각을 입에 물고 창가에 섰다. 북새통 속에 분주하던 아침 시간을 보낸 몸은 찬란한 햇살을 받고도 물먹은 솜처럼 천근만근이 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시간이라면 서재에서 책을 뒤적이거나 컴퓨터 안 세상에 나를 던져놓고 몰입했으리. 때로는 느긋하니 소파와 혼연일체가 되어 전화기나 티브이 리모컨을 이리저리 돌리며 한유를 즐기고 있었을 터 일게다. 불과 얼마 전의 시절들이 먼 옛날인 듯 아득하기만 하다.

곁에 사는 딸아이가 육아휴직을 마치고 직장에 복귀하며 손자육아를 맡게 됐다. 그 후 모든 생활 중심이 손자생활패턴에 맞춰 하루시간을 보내고 있다. 잠든 시간 외에는 천방지축 움직이는 귀여운 악동을 따라다니며 저지레를 막으려 내 몸은 더 부산해져야 한다. 그것뿐이랴. 삼십년이 넘는 세월을 남편과 한 이불 덮고 자던 안방을 벗어나 이젠 손자와 동침하며 자연스런 각방생활로 돌입했다. 확실하게 생활의 변화를 맞은 것은 할미만이 아니다.

딸아이 셋을 키우며 참 분주하게 보내던 시절이 엊그제 같다. 아이들이 한참 개구 지던 시기에는 잠시도 엉덩이를 땅에 붙일 새 없이 하루가 찰나같이 지나갔고 몸은 늘 피곤에 절어있었다. 자식 셋을 주셨으면 끌어안을 팔도 셋을 주셔야 하지 않냐며 모자란 손길을 하늘에 대고 푸념한 적도 있었다. 엄마로서 할 수 있는 기량을 혼신을 다해 쏟아내던 지난날이었다.

올망졸망하던 딸 셋이 어느 순간 훌쩍 커버리고 인생의 반려들을 만나 내 품을 다 떠나갔을 때 그때서야 그리도 갈망하던 호젓한 시간과 육체적 안온함을 얻었다. 그러나 오롯한 내 시간을 만들어 알차게 영위하리라는 로망과는 달리 어느 날부터 삶의 열정이 다 사그라져 자존감이 바닥으로 처박힌 나의 존재가 보이기 시작했다. 무슨 뒤 변덕스런 심사란 말인가.

어느덧 쌓인 두둑한 나이 앞에서 시간이 넘쳐나도 필요로 하는 곳 없는 존재의 무용함이 서글퍼졌다. 경제성과 연관된 쓸모만이 가치만큼 인정받고 살아남는 시대인데 남은 것은 의미 없이 흘러가는 한유한 시간뿐이고 그에 비해 자존감은 자꾸 주저앉았다. 세상을 향해 나아가려는 의지와 용기를 늙음이란 빗장을 쳐가둬 놓은 것이 결코 나 스스로 택한 어리석음만은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딸의 복직과 함께 시작된 손주육아는 그동안 잊고 있던 나의 대단한 쓸모를 다시 찾게 해줬다. 할미의 진한 사랑이 살뜰한 의미로 유용하게 쓰이고 있는 쓸모에 감사하고 감사하다. 누군가 우스갯소리로 지극정성 손주 키우고 나면 남는 것은 골병이란다. 그래도 어쩌랴. 할미 사랑으로 하루하루 달라지는 봄날같은 손주를 보며 내가 얻는 행복이 이렇게 큰데 무엇을 더 바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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