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침반]
박진환 문화과학부 차장

20여년 전의 일이다.

서울의 한 국립대학에 다니는 필자의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번에 장학금을 받게 됐는데 절차가 까다롭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성적장학금이지만 학교에서는 '왜 장학금을 받을 수 밖에 없는지 집안사정을 기재해야 한다'며 어떤 내용을 적어야 할 지 고민"이라고 했다.

결국 '가정형편이 어려워 부득이 장학금을 신청하게 됐다'는 내용의 신청서를 작성해 대학에 제출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나중에야 알게 됐지만 그 친구의 소명아닌 소명서를 읽은 학교 관계자들은 다들 크게 웃었다고 한다.

소명서에는 '가족들도 어렵고, 아버지 차량을 운전하시는 분도 어렵고, 집안에서 일을 도와주시는 분들도 사정이 딱하다'는 내용이었고, 주소는 당시 대한민국 최고의 부촌(富村)으로 알려진 유명한 공동주택으로 기재됐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친구들 사이에서 유명한 일화지만 아직도 한국 사회에는 이 같은 일들이 종종 벌어지고 있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똑같은 밥을 먹기 위해, 장학금을 타기 위해, 뭔가 특별한 중·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자신과 부모의 가난을 입증해야 한다.

또 사회에 나가거나 결혼 후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도 가난을 입증해야 한국 사회에서 보다 특별한 혜택(?)을 누릴 수 있다.

급기야 이 혜택은 수년전부터 한국 사회를 양분시키며, 최대 정치적 이슈로 급부상하기 시작했다.

무상급식에서 출발한 '무상시리즈 논란'은 한동안 모든 선거에서 핵심 쟁점으로 거론됐고, '무상=포퓰리즘'이라는 주장과 '무상=보편적 복지'라는 논리가 충돌하면서 보수와 진보를 대변하는 용어로 사용됐다.

그런 와중에 정부와 여당이 무상보육이라는 카드를 꺼내면서 이 싸움은 잠시 멈췄다가 최근에는 박근혜 대통령의 복지정책이 당초 후보시절 공약에 비해 후퇴했다는 내용으로 전선이 변하고 있다.

일부 정치인들은 유럽의 경제위기를 사례로 들며 "무분별한 복지정책 확대로 국가재정이 파탄났다"며 '선성장-후분배' 논리를 강조하고 있다.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퍼주기식 복지가 아닌 보편적 복지를 통해 저소득층을 중산층 대열로 합류시키는 것이야말로 한국이 나아가야할 과제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현재 전 세계적으로 국가적 차원의 복지정책이 가장 잘 구현된 나라들은 대부분 북유럽권 국가들이며, 유럽의 경제위기가 전 세계 경제를 위협하는 상황에서도 이들 북유럽국가들은 오히려 유럽연합을 지탱하는 버팀목이자 희망"이라는 논리를 펼치고 있다.

그러면서 지난 대선 당시의 공약이었던 경제민주화의 강력한 실천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정치권에서의 복지 논쟁에 대해 서민들은 이미 실망과 분노를 넘어 좌절 상태로 접어들었다.

무상급식은 아직도 일부 지역에서는 시장, 교육감의 반대에 의해 완전 시행이 어렵고, 사회적 배려 대상자를 위해 만든 특수목적고등학교의 특별전형은 대한민국 1%를 위한 꼼수로 전락했다.

대학생들의 반값 등록금 요구는 현재 정부 차원에서 논의조차 되지 못하고 있으며, 청년 일자리는 비정규직 양산이 이를 대신하고 있고, 공립 어린이집과 유치원은 맞벌이 부부에게 그림의 떡 신세다.

아무리 선한 의도를 갖고, 시작한 정책도 집행권자의 강력한 의지와 해결능력이 없으면 현장에서는 빛을 보기가 어렵다.

이제 대한민국은 서민들이 학업과 결혼, 출산, 일자리 찾기에서 상대적 박탈감을 갖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이들의 아픔과 눈물을 감싸 안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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