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1987년 12월 9일 MBC 사원들은 노동조합 창립선언문에서 "방송을 물이나 공기와 같은 환경요소 가운데 하나라고 볼 때 국민들은 맑은 물과 공기를 마실 권리가 있듯이 건전한 방송을 요구할 권리"가 있음을 지적하고, 따라서 "그동안 왜곡, 굴절되어 온 방송체제는 전면적으로 고쳐져야 하며 방송의 고유기능은 시청자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전적으로 방송인에게 맡겨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주 후인 12월 16일에 치러진 제13대 대선이 여당의 승리로 끝나면서 MBC 노조에 대한 회사측의 탄압이 본격화되었지만, 1987년 6월 항쟁이 고조시킨 민주화, 특히 방송민주화의 열기를 가라앉힐 수는 없었다. 1988년 5월 20일 KBS 노조가 결성되면서 양대 방송사 노조는 방송민주화운동의 구심점이 되었고, 이후 10년간 험난한 투쟁을 벌여나갔다. 이때까지는 ‘방송민주화 대 반(反)방송민주화’라는 대결 구도가 비교적 선명했지만, 정권교체가 일어나면서 갈등은 좀 복잡한 성격을 갖게 되었다.

민주화 이후 한국의 역대 정권들을 ‘보수’와 ‘진보’로 구분하는 게 좀 우습긴 하지만, 쉬운 이해를 위해 이 구분법을 쓰기로 하자. 노태우-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문재인-윤석열로 이어진 역대 정권들이 보수-진보-진보-보수-보수-진보-보수였다는 건 무얼 의미하는가? 정권의 색깔이 4번 바뀌면서 공영방송도 ‘색깔 교체’의 전쟁터가 되는 비극을 4번 겪었다는 걸 의미한다. 4번째 전쟁은 현재진행형이다.

누군가의 주장처럼, 한국정치의 수준은 4류다. 지나친 자기비하가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지난 36년간 5년 또는 10년마다 주기적으로 일어난 ‘공영방송 전쟁’을 막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만들지 못했다는 점에선 4류로 평가돼 마땅하다. ‘전쟁’이라는 과장법을 쓰긴 했지만, 그래도 피는 흘리지 않는 전쟁이라는 데에 감사를 드려야 할까?

지금 이 갈등은 ‘10 대 0’의 비율로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잘 하고 있거나 잘못하고 있는 게 아니다. 내가 볼 땐 ‘6 대 4’나 ‘5 대 5’의 싸움으로, 제3자의 입장에선 양비론으로 임하는 게 옳다. 나는 지난 8월 <‘공영방송 독립’을 윤석열의 업적으로>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그런 양비론을 피력한 바 있다. 양비론은 양쪽으로부터 동시에 공격을 받는 취약한 입장이긴 하지만, 진실이 그런 걸 어이하랴.

나는 그 칼럼에서 윤석열 정권이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한다는 제안을 했지만, 최근 윤 정권이 이 문제에 대응하고 있는 걸 보고 있자니 기가 막힌다. 아니 ‘상상력의 빈곤’도 정도 문제지, 저렇게까지 앞뒤가 꽉꽉 막힌 사람들이 있을까? 전 분야에 걸쳐서 그 모양이니 자멸의 길로 치닫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도대체 윤 정권이 원하는 게 뭔가? 야권의 주장처럼 ‘방송 장악’인가? 아니면 스스로 내세운 것처럼 ‘공정 방송’인가? 어떤 게 진심인가? 후자가 진정한 목적이라면, 왜 온갖 무리수를 써가면서 힘으로 밀어 붙이려고 드는가? 도덕적 우위를 점하면서 야당의 탐욕을 비난해도 모자랄 판에 왜 이런 한심한 이전투구만을 보여주고 있는가?

애초에 도덕적 우월성은 윤 정권에게 있었다. 민주당이 너무 뻔뻔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권 5년간 방송이 공정했나? 문재인이 임기초에 ‘기계적 중립’을 비판하면서 여야 합의로 만들어진 이른바 ‘공영방송 장악 금지법’을 단칼에 날려버린 건 무얼 의미하는가? 민주당은 사과조차 하지 않은 채 불공정 방송을 즐기다가 대선에서 패배하자말자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방송법 개정안을 들이밀면서 국민의힘에게 일방적으로 따를 것을 요구했다. 민주당은 결국 힘으로 밀어붙여 방송법을 통과시킨 후 윤석열이 거부권을 행사하자 "방송법 거부권 행사는 방송장악을 멈추지 않겠다는 대국민 선전포고"라고 비난했다. 이게 지난 12월 1일의 일이다.

민주당의 비난은 적반하장이지만, 국민의힘도 나을 게 없다. 왜 온 국민을 향해 "우리는 민주당과는 달리 방송을 진짜 중립지역으로 만들겠다"며 새로운 청사진을 제시하지 못하는가? 민주당이 했던 것처럼 방송을 장악하는 게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래서 ‘지금 이대로’가 좋다는 건가? 어리석은 생각이다.

국민의힘은 자신들이 민주당과 대등한 위치에 있다는 착각을 버려야 한다. 경제계에서의 우위를 고려하면 전체적으론 평평할망정 공영방송의 실세인 언론노조의 영향력을 감안하자면 방송은 국민의힘에게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이번 제4차 전쟁의 와중에서 나온 발언을 통해서 보자면, 언론노조와 언론노조에 가입한 방송인들의 기본 인식은 "국민의힘은 한마디로 방송장악에 있어서는 전과 집단"이며, "국민의힘이 언론자유를 추구하는 정당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을 얻기 힘들다"는 것이다.

국민의힘의 입장에선 억울할망정 그런 식으로 평판의 열세에 있다는 걸 감안해야 한다. 민주당은 언론노조를 통한 간접적인 방송장악이 가능하지만, 국민의힘은 직접 개입하는 무리수를 써야하기 때문에 온갖 논란을 불러 일으킬 수밖에 없다. 이 또한 명심해야 할 주어진 조건이다. 이런 상황에선 방송을 철저하게 중립지역으로 만드는 게 국민의힘에게 유리하다. 민주당처럼 방송을 장악해 재미를 보겠다는 헛된 꿈을 버리라는 것이다.

방송민주화를 위해 고초를 겪다가 암투병을 하면서도 공영방송의 지배구조를 개혁하기 위해 애쓰던 MBC 기자 이용마는 "공영방송 사장 선임과정에 공론화위원회 방식의 국민대표단 제도를 전격 도입해 국민들이 직접 사장을 뽑을 수 있게 하자"는 방안을 제시했다. 민주당 대선 주자였던 문재인은 이용마의 뜻을 이루겠다며 그를 두 차례나 직접 만나기까지 했지만, 남은 건 ‘사진 쇼’였을 뿐이라는 건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다.

이용마의 꿈을 윤석열과 국민의힘이 이뤄주길 바란다. 공영방송은 새로운 비전이 필요하다. 정치적 공정성 못지 않게 중요한 건 지금의 ‘정치 과잉’에서 벗어나 실질적인 민생의 현장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채널 하나는 기존 ‘서울공화국’ 체제에 도전하면서 지방소멸을 막는 일에 집중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윤 정권이 36년 묵은 ‘공영방송 전쟁’을 끝내고 공영방송의 새로운 비전을 실천하는 위업을 달성하길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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