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100미터 달리기를 할 때 모든 선수는 동일한 선에서 출발 신호와 함께 역주를 시작한다. 같은 거리를 누가 더 빠르게 달려 먼저 결승선을 통과하는 선수가 이기는 것이다. 공정한 경쟁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달리기 시합의 얘기일 뿐 우리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부분의 경쟁은 동일한 출발선이 보장되지 않는다. 어떤이는 50미터 앞에서 시작하고 또 누군가는 50미터 뒤에서 출발해 힘겹게 달려야 한다. ‘금수저’니 ‘흙수저’니 하는 단어를 쓰지 않아도 설명이 된다.

금수저와 흙수저를 구분짓는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의 재력이다. 안타깝게도 부모의 재력에 따라 그 자녀들이 서게되는 출발선이 서로 다르게 정해지는 것이 현실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대부분 이 불공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조금 뒤에 서있는 이들은 스스로 조금더 부지런하게 달리면 격차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사실 그렇기도 하다. 하지만 금수저는 고사하고 흙수저도 없는 ‘무수저’들의 상황은 다르다.

가정 학대와 보호자의 사망, 빈곤, 부모의 이혼 등의 이유로 가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아동이 충청권에서만 매년 700명 이상 발생한다. 시설에 입소하기도하고 입양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가장 좋은 방식은 위탁가정을 통해 가정과 비슷한 환경에서 보호를 받으며 성장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충청권 지자체 대부분은 보건복지부의 양육보조금 권고를 지키지 못하고 턱없이 모자란 금액만 지원하는데 그치고 있다. 이러다 보니 위탁가정을 발굴하는 것 자체도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

위탁가정을 희망하는 가정은 사실상 최소비용에도 못미치는 부족한 지원금을 받고 봉사하고 희생하는 심정으로 아이들을 돌보고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들의 선의에 기대서 될 일은 아니다. 정책적으로 양육보조금을 확대해야 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아이들의 성장에서 가장 좋은 방식임을 이미 알고 있는 만큼 위탁가정이 확대될 수 있도록 양육지원금 확대에 적극 나서야 한다. 보호대상 아동에 대한 최소한의 지원은 우리 사회 모두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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