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복만 충남도의회 제1부의장

중봉 조헌 선생은 조선 선조 때 문신으로 임진왜란기의 의병장으로 크게 활약한 인물이다. 그는 1592년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충북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군이 점령한 청주성을 수복하고, 충남 금산 연곤평에서 1만 5000명의 왜적에 대항해 700명의 의병과 전투를 벌여 순절했다. 조헌 선생이 숨진 지 4일 후, 그의 제자인 전승업과 박정량 선생이 금산 금성면에 700명의 시신을 거둬 하나의 무덤에 합장하면서 ‘칠백의총’이라 이름 붙였다. 칠백의총은 1963년 사적 제105호로 지정돼, 매년 9월 23일 칠백의총 종용사에서 순의제향을 실시해 칠백의사의 숭고한 호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조헌 선생은 생전 학문을 닦은 훌륭한 학자였다. 그는 충남 공주의 계수제독관으로 부임 중에 선비들을 가르치면서 여분의 시간에 학문을 닦아 삶을 우선시하는 ‘실천유학자’로서의 자세를 강조했다. 또 조헌 선생은 전쟁을 대비하자는 상소를 자주 올렸으며, 상소를 올릴 때 도끼를 함께 가져가거나 머리를 여러 번 땅에 치는 등 강경한 자세로 읍소했다. 도끼를 가져가 상소를 올리는 ‘지부상소’는 정명한 일에 대해 뜻을 굽히지 않는 정신, 그 자체를 보이기 위한 방법이었다. 조헌 선생은 각종 군대 확충과 백성을 우선하는 ‘위민’을 위한 대책도 끊임없이 제시했다. 하지만 조헌 선생의 지속적인 우려와 강경한 개혁 주장에도 폐단과 부조리 등은 시정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문제를 인식하며 명확한 대책을 제시한 조헌 선생의 의로운 삶과 굽히지 않는 높은 정신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본받아야 할 덕목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조헌 선생은 1575년 동인과 서인이 분당한 이래 당쟁이 기승을 부리던 시기를 겪었던 인물이다. 당시 시대상은 거대 양당이 대립하는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다. 현재 우리나라는 고령화와 지방소멸, 기후변화, 고금리 등 가히 국가 재난에 비견될 정도의 위기를 겪고 있다. 조헌 선생이 국난을 타개하기 위해 이념과 갈등에서 벗어나 즉시 행동하는 면모를 보였던 것처럼, 현대의 정책결정자들이 그간의 정치적 갈등과 대립에 대해 자성해야 한다. 또, 국가적 위기상황에 집중해 대응하는 본연의 역할을 다해줘야 한다. 또 ‘중봉조헌선생기념사업회’에서 내달 20일까지 임진왜란의 의병장이자 조선 중기의 대학자·정치인·문학가였던 조헌 선생을 소개하고 홍보하며 선양하는 유튜브 영상 공모전을 진행한다. 이번 공모전을 통해 조헌 선생의 자세와 정신을 많은 이들이 일깨우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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