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중순 대전시의회 의장

 “이기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차피 싸우다 죽게 되겠지요. 그러나 괜찮습니다. 일본의 노예가 되어 사느니 자유민으로 죽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때로는 한 장의 사진이 그 어떤 말보다 우리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 때가 있다. 황량한 들판에 서서 누군가를 향해 낡은 총을 겨누고 있는 열 명 남짓의 사람들. 우리가 국사 교과서에서 한 번쯤은 보았던 의로운 군대, 바로 의병(義兵)사진이다. 1907년 푸른 눈의 이방인이었던 영국 특파원 맥켄지가 찍은 이 사진 속 모두는 이길 수 없는 싸움이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걸며, 나라를 위하는 단 하나의 신념으로 가득 찬 모습이다. 그들의 눈에서는 두려움도 슬픔도 찾을 수 없다.

 오는 현충일(6일), 민주항쟁 기념일(10일), 전쟁일(25일), 두 차례의 연평해전일(15·29일)까지 6월은 우리에게 아픔과 함께 이 땅을 지켜낸 모든 분들의 희생에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가지게 되는 날이다. 나라의 위태로움 앞에 누구의 명령도 없이 자발적으로 침략에 맞서며 사라져 갔던 이름 모를 수많은 의병 선열들을 기리는 6월의 첫째 날인 의병의 날 역시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날이다. “사진은 슬프지 않다. 다만 사진에 화석 같은 흔적만 남기고 사라진 것들이 슬플 따름이다”라는 강운구 사진작가의 말이 11주년을 맞는 의병의 날 즈음 더욱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삼국시대부터 시작된 긴 역사를 지니고 있는 의병의 대표적 활동으로는 조선 말 항일의병이 있다. 1895년 을미의병에서부터 1915년 11월 4일 대한제국 마지막 의병장 채응언 장군의 최후의 날까지 풍전등화의 나라를 위해 양반과 농민, 남자와 여자 구분 없이 모두가 함께 나섰다. 그리고 그 항일의병의 시작은 대전이었다.

 1895년 조선의 국모를 시해한 커다란 사건으로 인한 조선의 분노는 활활 타올랐다. 이에 문석봉 선생은 지금의 유성장터에서 대전의 유학자, 농민들과 함께 '유성의병'을 일으켰다. 유성의병들은 회덕현 관아에서 무기를 빼앗아 무장한 뒤 공주 공암을 거쳐 공주 와야동에서 관군과 싸우다가 패하며 안타깝게도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이는 이후 전국으로 파급된 을미의병의 효시가 된 의미있는 발걸음이었다.

 '여기에 비석을 세움은 유성의병의 사적을 후세에 알려 다시는 치욕의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으며, 백여 년 전 유성의병의 기개가 우리 후손들에게 길이 전해지기를 바라는데 그 취지가 있다. 유성시장 안 장대공원에 모셔져 있는 '유성의병사적비'에 적혀 있는 마지막 글이다. 다행스럽게도 126년 전 일제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가장 먼저 분연히 일어섰던 대전 의병선열들의 의지와 용기는 대전만의 정신이 돼 여전히 우리 마음 속 깊이 자리하고 있다. 그렇기에 코로나19로 인한 1년이 넘은 긴 시간 동안 대전시민 모두는 함께 하나된 마음으로 어려움을 이겨내는 저력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이다.

 민족사학자 박은식 선생께서는 “나라는 멸할 수 있어도 의병은 멸할 수 없다”고 말했다. 올곧은 의(義)를 향했던 순수한 마음과 용기, 신념이 국가적 위기 때마다 우리를 하나되게 하며 더욱 단단하게 이어줬음을 우리는 지난 역사 속에서 생생히 경험했다. '한 개의 촛불로 많은 초에 불을 붙여도 처음 촛불의 빛은 약해지지 않는다'는 말처럼 나부터 시작하는 대전 시민들의 굳건한 의지와 용기가 있다면 코로나19로부터 안전해 질 수 있는 희망의 그 날은 반드시 오리라 확신한다. 올해 의병의 날은 불꽃처럼 나라와 민족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의병 선열들을 다시 한 번 기억하는 의미있는 날이 되길 바라본다. 바람에 누워도 다시 일어나는 들풀을 닮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 의병정신이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