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옥 청주시 1인1책 펴내기 강사

세찬 소낙비가 한 줄 금 쏟아졌다. 하늘을 덮고 있던 먹구름이 대지 위로 곤두박질치며 순식간에 사방을 빗속에 가두더니 금세 언제 그랬냐는 듯 태양이 뜨겁게 내리쬔다. 오뉴월 장맛비는 소 등걸을 두고 다툰다는 말이 있더니 멀찍이 보이는 동네까지 하늘은 쾌청하다.

물 폭탄 같던 소낙비가 남기고 간 땅의 풍경이 아직도 질척하다. 습도가 높아 후덥지근한 탓에 문밖을 나가기가 썩 내키지 않지만, 툭 털고 일어나 산책길에 나섰다.

며칠 전부터 칸나가 발그레한 꽃망울을 뾰족이 내밀더니 그새 만개했다. 빗방울과 햇살을 동시에 머금고 있는 붉은 꽃과 널따란 잎사귀가 끈끈한 날씨와는 달리 청초하기 그지없다. 넉넉하여 후덕해 보이는 잎새 하나를 손으로 툭 건드리니 머금고 있던 빗방울을 주르르 떨어트린다. 흐르는 빗물에 그리움이 왈칵 몰려온다. 잎새 사이로 흘러내리는 빗물에 아버지의 뒷모습이 보인다.

한여름 광폭의 비바람에도 꼿꼿하게 잎사귀를 키우고, 척박한 무지렁이 땅에서 기어이 꽃을 피워내는 칸나의 계절이오면 아버지가 떠오르는 건 무슨 까닭인지.

휘적휘적 걸으시던 아버지의 산책길 양옆으로 여름이 깊어질수록 칸나는 피어났었다. 구부정한 허리와 투박한 걸음걸이로 한낮 땡볕이 설핏 수그러질 때쯤이면 아버지는 산책길에 나섰다. 연로하신 탓에 산책 반경은 늘 한정돼있었다.

칸나가 즐비하게 심어진 오솔길을 되짚어서 두어 번 걸으시다 한숨 돌리는 종착지는 천변 작은 벤치다. 그리 먼 거리도, 긴 시간도 아니었건만 벤치에 앉아 가쁜 숨을 고르시던 아버지의 뒷모습이 보일라치면 자식의 숨통도 덩달아 뻐근해졌다. 산책길은 엄마와 늘 함께하던 오솔길이었다. 엄마가 황망하게 아버지의 손을 놓고 하늘길에 오르신 후로 홀로 걸으시던 모습을 여 나무 번이나 봤을까. 짝을 잃은 아버지의 다리와 팔은 그날부터 여름 장맛비 쏟아지듯 힘아리를 잃으신 것 같다.

아버지는 참 호기로운 분이셨다. 땡볕이 기승을 부리는 삼복더위에도 더 짙푸르게 자라나는 넉넉한 칸나 잎사귀의 기개와 풍모는 아버지의 성품과 참 많이 닮았다.

칸나의 꽃말 중 유독 존경이란 단어에 마음이 간다. 풍파 많은 세상일지라도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한 후 당당하게 살라 늘 이르셨다. 자식을 엄하게 훈육하시던 깊은 뜻이 아버지의 연륜에 가까워져 올수록 가슴에 더 닿는다. 이젠 기억조차 희미해질 만큼 세월이 지났지만, 칸나 잎사귀는 아직도 아버지의 모습으로 자식에게 투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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