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옥 청주시 1인1책 펴내기 강사

어디로 갈까, 미리 목적지를 정한 곳도 없이 집을 나서도 전혀 두렵지 않다.

어딘들 어쩌랴. 그냥 발길이 닿는 대로 내게 주어진 한유를 즐길 요량이면 목적지를 정한들 무슨 의미가 있으랴.

오늘은 집에서 좀 떨어진 곳으로 가볼까 하는 마음에 자동차에 올랐다. 나만큼이나 주행 연륜이 쌓인 애마지만 어디고 늘 함께해주는 것이 감사하다.

살짝 열어놓은 차창으로 밀고 들어오는 바람결이 상쾌하다. 그뿐인가. 앞 유리창 넓이만큼 보이는 전방에서 온통 풀빛으로 물든 산색이 녹음방초로 출렁대며 어서 오라 손짓하는 듯하다.

집에서 출발한 지 불과 이십여 분 남짓 지나니 대청댐 둘레길로 접어든다. 주변 길을 느린 속도로 달리면서 유월의 풍경에 빠져들 즈음 녹음이 우거진 메타세쿼이아 나무 아래 쉼터 하나를 찾아 앉았다. 그득한 담수호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새가 몇 번 넘나들며 노니는가 싶더니 잔잔하던 물 위에 몇 겹의 둥근 파문을 그려놓는다. 그 풍경이 그지없이 자애로워 보이며 피안의 행복을 말해주는 것 같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회자하던 무념무상으로 머리를 비우고 물을 바라보는 것을 일명 물 멍이라 하던가.

시끄럽고 분주한 생활에서 한 번쯤은 모든 것 다 내려놓고 멍한 시간을 갖고 싶었다. 사회의 일원으로 얽히고설켜 열과 성을 다해 앞만 보며 달려가는 것도 삶의 열정이겠지만 그런 모든 것에서 자유롭게 헤어나와 머리를 텅 비우고 멍하니 생각을 비워내고 싶었다. 내 안에 잠재된 사욕도, 번민도 심연에 쌓인 묵은 감정까지도 한 번쯤 싹 비워지는 날, 교만도 스스로 잠재울 수 있는 자애가 생길 것만 같다.

꽃향기도 아니건만 풀냄새가 이리도 상큼했던가, 마음을 비우려 노력하며 느린 시간 안에 나를 놓으니 모든 것이 풋풋하다.

바람결에 실려 오는 풀냄새에 지저귀는 새소리를 곁들이니 심연 깊숙이 붙어있던 찌든 때을 말끔히 씻어낸 신선이 된 기분이다.

녹음이 짙어진 나무 아래 한가로이 앉아 잔잔한 호수를 멍하니 바라보는 지금의 나는 세상의 누구보다 호사를 누리고 있음이 확실하다.

유월을 누리 달이라 하는 것은 누리는 세상을 의미한다고 한다. 낮이 가장 긴 달로써 밝음을 맘껏 누릴 수 있는 달이라 하니 눈으로, 코로 누리는 지금, 이 순간을 감사하리라. 집에서 몇 걸음만 나와도 아름다운 자연을 누릴 수 있는 청주, 이곳에 사는 나는 매일매일 호사를 누리며 사는 여자다.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