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윤석 대전을지대학교병원 산부인과 교수

사람은 이성으로 살까? 욕망으로 살까? 약 2500여 년 전 플라톤은 ‘영혼을 도야하기 위해 이성이라는 마부가 의지라는 말과 욕망이라는 말을 이끌어야 한다’고 했다. 이성이 가장 중요하고, 욕망은 결핍이라는 것이다. 인간을 옭아매는 욕망으로부터 벗어나야 ‘자유로운 영혼’이 될 수 있다는 플라톤적 사고는 인류사의 중심적 흐름이 된다.

17세기 합리적인 사고가 도래할 때 ‘내일 세상의 종말이 오더라고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욕망을 피력한 스피노자가 등장한다.

욕망은 인간의 결핍이 아닌 생산적 활동성이고 자기보존의 욕망, 즉 코나투스가 인간의 모든 행동을 지배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이 헛된 꿈이라고 여긴 이 세상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세계임을 제시한다. 자신의 욕망이 삶의 본질이 되는 순간이었다.

20세기는 여러가지 면에서 이전과는 다른 세기다.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타자(他者)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에 답해야 했다.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타자가 어떻게 폭력적인 현실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를 목도하면서 타자가 전면에 등장 세기다. 자크 라캉은 욕망도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했고, 르네 지라르는 타자의 욕망을 차지하기 위한 모방적 경쟁이 더 큰 욕망을 만든다고 했다. 타자가 등장한 세상에서 ‘내 마음이 내키는 대로 하라’는 말은 대중의 마음, SNS의 학습된 지식, 소비주의 신화, 광고의 욕망을 따라하는 기계적 마음이 된 것이다.

21세기에는 가상 세계가 등장했다. 과거와 다른 시공간이 열리면서 우리의 생존 본능도, 우리의 욕망도 변하고 있다.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것에서 정신적 안정과 기쁨을 더 중시하게 된 것이다.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미국인들보다 빈곤한 티베트 국민이 행복한 이유가 이것이다.

가상 세계를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면서 우리는 전방위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다. 스피노자가 말한 나의 욕망 뿐만 아니라 플라톤적 결핍의 욕망, 라캉의 타자의 욕망까지 우리를 흔들 것이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사람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사람까지 우리들 눈앞에 서성거릴 것이다. 특히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점은 물질을 모으는 것보다 더 어렵기에 그것을 질투하거나, 더 나아가 분노를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즉 21세기는 육체적인 쾌락보다 정신적 안정과 기쁨이 더욱 중요해졌다는 것이다.

미래학자인 멜린다 데이비스는 욕망의 진화를 말하고 있다. "지금까지 욕망은 몸과 연결된 것이었지만, 앞으로의 욕망은 ‘내 마음을 잃지 않는 것’, ‘내면의 기쁨’, ‘안전하고 행복한 가정’, ‘마음의 평화’와 같은 것으로 급격하게 옮겨갈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생존 대신에 인간적 성숙이 중심 목표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무엇을 원하는 욕망은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엔진이다. 욕망의 변화는 또 세상의 변화다.

새로운 욕망이 태동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아직도 타자의 욕망에 휩쓸리고 있는지, ‘정신적 생존’과 ‘정신적 기쁨’을 향한 21세기적 욕망을 어떻게 이끌고 어떤 준비를 해야 할지 곰곰이 생각해 볼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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