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위원칼럼] 정진철 대전복지재단 대표

과거 김영삼 정부 시절 행정쇄신위원회라는 기구가 있었다. 군인이 아니라 민간인 출신이 대통령에 당선돼 정부의 이름도 ‘문민정부’라고 칭했던 김영삼 정부에서 사회 구석구석에 남아 있는 각종 폐단과 병폐를 찾아 개선하고자 만든 기구였다. 필자도 이 위원회에 파견돼 1년 반 정도 근무했다. 당시 위원 중에 잘 나가던 논객인 모 언론사 인사가 있었다. 이 분은 위원회에서 “우리나라에서는 '물 쓰듯이'라는 말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때만 해도 생수라는 것이 생소한 시절로 그 분의 주장은 ‘물 쓰듯이’라는 말 때문에 물 귀한 줄을 모르고 낭비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정말 그 분의 말씀대로 요즘엔 물가지수의 품목별 가중치에 있어 가정용 상수도 요금(1개월)은 1000분의 5.8로, 쌀(20kg)의 1000분의 6.2에 버금가는 수준이 됐다.

과거 선거에서 ‘무상’이라는 단어가 사회의 최대 화두가 된 적이 있다. 서울시에서는 학교의 무상급식을 둘러싸고 시장과 의회가 충돌하면서 시장이 주민투표라는 수단을 동원했다가 결국엔 시장이 교체되는 일이 있었다. 이외에도 무상의료 등 많은 무상 시리즈가 등장했다. 필자는 여기에서 우리가 신중히 생각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고 본다. 정부가 무상으로 학생들에게 점심을 주면 그 비용은 누가 부담하는가? 정부는 기본적으로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기관이다. 그러니 세금을 거둔 만큼밖에 일을 못하는 구조다. 만약 세금을 거둔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하려면 국채를 발행하거나 한국은행에서 돈을 꿔오는 수밖에 없지만, 이것도 결국은 빚으로 세금으로 갚아야 하는 국민의 부담이다.

그러니 필자는 ‘무상’이라는 표현을 ‘공동부담’으로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령 ‘무상급식’도 ‘개별적으로 급식비를 받지 않고 학교에서 모든 학생에게 급식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 중에 학생이 있거나 없거나를 불문하고, 학생들에게 학교에서 급식을 제공하는데 필요한 비용을 모든 사람이 나눠 부담하는 것’이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즉 "무상 급식을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는 질문은 "우리 집엔 학생이 없지만, 옆집 아이가 학교에서 급식을 받는데 나도 그 비용의 일부를 부담할 용의가 있느냐?"로 바뀌는 것이 맞다는 것이다.

몇 년전 서울의 무상급식을 둘러싸고 논란이 있을 때 한 여론조사에서는 오히려 강남의 잘 사는 자치구에서 무상급식에 대한 찬성률이 더 높게 나왔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 이유는 강남의 부유층 입장에서는 세금을 많이 내는 만큼 내 아이 점심이라도 그 세금으로 먹여야겠다는 심리가 작용한 것이라는 분석이었다. 과거 서양의 왕권시대에 왕의 무분별한 과세권을 제한하기 위해 국민의 대표로 구성된 의회를 구성했고, 과세를 하려면 의회의 승인을 받도록 한 것이 근대식 민주주의가 태동하게 된 배경이다. 그러기에 지금도 세금에 관한 이슈는 모든 선거에서 뜨거운 감자며 논란거리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외형상의 민주주의가 먼저 도입됐고, 이후 우여곡절을 거쳐 절차상의 민주주의가 완성되다 보니, 여전히 선거 과정에서 세금 문제는 중요한 이슈로 취급되지 않고 있다. 사회복지도 마찬가지다. 보편적 복지니 선택적 복지니 하는 이분법적 사고로 단순하게 논의되곤 하지만, 이 문제 역시 세금과 관련된 문제이며, 더 내고 더 받을 것인지, 덜 내고 덜 받을 것인지에 대한 선택의 문제로 본다면 매우 민감한 사안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근본적인 사항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없는 상태에서 여러 가지 제도가 산발적으로 양산되는 것은, 건물로 비유하면 설계도도 없는 상태에서 층수만 높이는 것과 같다. 그것도 한쪽은 양식으로, 한쪽은 한식으로. 공공에서 소비하는 비용은 결국 우리 모두가 십시일반해 부담하는 것이다. 세상에 공짜라는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공동체의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내 것을 기부하고자 하는 마음과 공짜의 유혹에서 벗어나 꼭 내가 받아야 할 ‘만큼’만 챙기려는 분위기가 자리 잡을 때 비로소 성숙한 시민의식이 자리 잡은 선진국 대열에 합류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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