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전북대 명예교수)

왜 양심적이고 정의롭고 균형 감각을 갖춘 사람이 정치에 입문한 뒤 금배지만 달고 나면 극단적 언행에 앞장서거나, 강성 지지층의 극단적 행태에 침묵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할 이 질문에 대해 경향신문이 지난 2월 2일 특집기사를 통해 전 의원 A의 입을 빌어 답을 내놓았다. A는 "특히 선거가 다가올수록 의원이 소신 있는 목소리를 내기가 쉽지 않다"면서 "소위 말하는 강성 당원들에게 찍히면 경선에서 살아남기가 어렵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자신을 지지하는 강성 팬덤 당원들을 많이 거느린 정치 지도자는 정당을 자기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 "민주주의 체제하에서 어찌 저런 일이 가능한가?"라는 의문을 품게 만들 정도로 말이다. 더불어민주당 대표 이재명은 어떤가? 최근 민주당에서 벌어진 공천 파동의 대표적 사건인 ‘박용진 탄압’을 음미하면서 생각해보기로 하자.

2월 20일 민주당 의원 박용진은 국회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저는 어제 민주당 국회의원 의정활동 평가에서 하위 10%에 포함되었음을 통보받았다"며 "납득하기 어려운 사실이고 오늘 민주당이 정해놓은 절차에 따라 재심을 신청하겠다"고 밝혔다. 박용진뿐만이 아니었다. ‘비명횡사·친명횡재 공천’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모든 공천의 기준은 오직 이재명에 대한 충성도가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이와 관련, 이재명은 "혁신 공천은 피할 수 없는, 말 그대로 가죽을 벗기는 아픈 과정"이라고 했다. 하지만 민주당 싱크탱크 민주연구원 부원장을 지낸 최병천은 "문제는 하필 ‘비명의 가죽’만 집중적으로 벗기고 있다는 점"이라며 "그 가죽으로, 찐명의 가죽잠바를 만들고 있는 중"이라고 비판했다. 그런데 어떤 변화가 있었길래 그런 일이 가능했단 말인가?

과거엔 각 의원실이 제출한 활동 자료와 동료 의원의 다면평가, 지역구 여론조사를 기계적으로 합산했지만, 이재명의 ‘시스템 공천’은 평가위원의 ‘정성평가’ 항목을 22%로 늘렸으며, ‘하위 평가자’는 경선 득표수의 최대 30%까지 감산하도록 해 불이익을 강화했다. 과거엔 ‘하위 명단’에 비주류만 일방적으로 포함된 적이 없었다. 정량평가로 하면 특정 그룹에만 페널티를 주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정성평가 항목의 평가 근거는 비밀이었다. 박용진은 재심신청서에서 다면평가·정성평가 기준을 명확히 밝혀 달라고 요구했지만, 당 공관위는 회의도 열지 않은 채 기각했다.

이재명에겐 또 하나의 ‘시스템’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막강한 팬덤 권리당원이다. 그는 ‘팬덤정치의 달인’이 아닌가. 이재명 팬덤은 대거 권리당원으로 참여해 민주당 여론을 장악했고, 이재명은 권리당원의 권리를 대폭 강화했다. 이들은 공천 과정에서 여론조사 번호를 미리 공유하고 "수박을 박살 내자"고 서로 독려했다. 이게 바로 각 지역구에서 ‘비명 현역’과 ‘친명 원외’가 맞붙을 때마다 ARS 여론조사 응답률이 치솟은 이유다.(중앙일보 3월 13일자)

민주당 후보 경선은 권리당원 50%, 여론조사 50%를 반영한다. 박용진은 정봉주와 맞붙은 경선에서 둘 다 정봉주를 이겼지만 자신에게 적용된 30% 감산으로 인해 패하고 말았다. 정봉주가 ‘막말’로 후보직을 사퇴했지만, 후보직은 박용진에게 승계되지 않았다. 박용진의 이전 경선 성적에 비추어 위험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건지 민주당 지도부는 박용진의 30% 감산 페널티를 계속 고수하면서 두가지 꼼수를 추가했다. 서울 강북을과는 아무런 연고가 없음에도 정치 신인과 여성 후보자로서 25%의 가산점을 받을 수 있는 후보(조수진)를 내세웠고, 강북을 권리당원의 비중을 30%로 하면서 전국 권리당원의 비중을 70%로 한 ‘당원 100%’ 온라인 투표‘로 룰을 바꾼 것이다.

드라마나 코미디에 등장하더라도 ’막장‘이라고 욕먹을 해괴한 방식이었지만, 박용진은 ‘바보’가 되겠다며 이 경선마저 수용했다. 물론 조수진이 이겼지만, 그마저 성폭력 ‘2차 가해’ 문제가 불거지면서 사퇴했다. 이젠 시간적 여유도 없어 박용진에게 공천이 돌아갈 가능성이 높아졌지만, 모든 권한을 위임받은 이재명의 선택은 친명 대변인 한민수였다.

한겨레는 ‘공천 참사’라고 했고, 동아일보는 "이쯤이면 ‘폭력’"이라고 했다. 이밖에도 ‘공천 참사’의 사례들은 무수히 많았다. 이재명 부부, 대장동 사건과 성남FC 불법 후원금 사건 등의 변론을 맡았던 변호사 5명이 민주당 우세 지역에 줄줄이 공천된 건 어떤가. 민주당 사람들은 그 부당성에 대해 침묵하면서 모두 이재명의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3김 시대 ‘제왕적 정당 대표’의 귀환인가? ‘총재’ 또는 ‘당수’로 불렸던 3김은 오랜 세월에 걸쳐 경륜과 카리스마를 갖춘 정당 창업자였다. 반면 이재명은 늘 민주당의 변방에 머물던 아웃사이더였지만 팬덤의 힘으로 채 10년도 안된 짧은 기간에 민주당을 장악한 기적의 사나이다. 자신의 서러움과 원한을 풀고 남을 정도로 복수는 화끈했다. 지지자들은 이런 인간 승리 서사에 더욱 열광한다.

과거에도 열성 지지자들은 있었지만, 지도자가 직접 개입해 그들을 조직하면서 직접적인 소통을 한 적은 없었다. 여기에 더하여 디지털혁명 시대의 ‘정치군수업자들’을 적극적인 관리의 대상으로 삼아 자신의 언론으로 이용한 사람도 없었다. 자신의 존재를 전국적으로 알린 "박근혜의 무덤을 파, 박정희의 유해 곁으로 보내주자"는 2016년의 과격 발언이 시사하듯이, 이재명만큼 대중의 피를 끓게 만드는 증오·혐오를 선동한 지도자도 없었다.

이재명은 그런 새로운 유형의 정치를 선보여 성공시킨 천재일 수 있지만, 그가 이룬 모든 걸 역사적 진보라고 할 수 있을까? 역사적 퇴행은 아닌가? "이쯤이면 ‘폭력’"이라고 할 수 있는 반민주적 정치행태에 대한 대중의 묵인, 그리고 열혈 지지자들의 종교적인 추종은 증오·혐오의 선동에 의존하고 있잖은가. 그럼에도 이 모든 걸 만든 장본인은 그간 증오·혐오의 풍성한 먹거리를 제공해 온 대통령 윤석열이다. 그가 대통령이 된 8할의 책임이 문재인 정권에 있듯이, 그는 현재의 이재명을 만드는 데에 8할의 기여를 했다. 이재명은 또 누구를 위한 8할의 기여를 할 것인지, 한국 정치의 고질적인 자해(自害) 악순환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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