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영 증평군수

이재영 증평군수
이재영 증평군수

증평군은 독립돼 개청된 지 올해 21년 된 신생 군이다, 역사가 짧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증평의 뿌리와 정신은 모두의 상상을 뛰어넘는 오랜 발자취를 지니고 있다.

단군조선의 이념인 홍익인간과 재세이화의 정신을 이어받아 증평은 일제의 신사가 있던 장소에 신사를 불태우고 민족정기가 서려 있는 단군전을 건립했다. 당시 읍도 아닌 마을이었던 시기에 주민들의 참여로 건립됐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다.

주민들은 일제의 신사가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이를 없애고 단군전을 건립하기로 뜻을 모았다. 1948년 유지들의 정성과 헌신으로 건립된 것이 증평 단군전이다. 어떤 분은 땅을 희사하고 주민들 또한 십시일반으로 성금을 모았다. 이렇게 건립한 단군전은 우리나라 모든 자치단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국에 33곳, 충북에는 단 3곳만 존재하며 증평의 5000년 단군조선의 정신을 이어가는 역할을 하고 있다.

4세기 중엽인 한성백제 시기에 쌓은 추성산성은 역사적 가치가 높아 국가 사적으로 관리하는 성이다. 중심인 행갈과 시화 마을은 이미 삼국시대에 번화한 지역이라 백제가 성을 쌓고 고구려가 차지하고 이후 신라가 점령한 삼국의 각축장이 됐다. 시화 역참은 삼국은 물론 중국까지 연결하는 중심 역할을 했다. 세종 시대에 전국의 공납제도를 바꾸기 위한 모범으로 시화 마을 제도를 배워오도록 직접 지시했을 정도로 번화한 지역이었다.

이렇게 반드시 차지해야 하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증평은 무신들에게는 이곳에서 전략과 전술을 다듬어 보고 싶은 지역이었고 공신들의 자취가 서려 있는 고장이다. 증평읍 송산리에 묘소가 있는 배극렴은 고려말 조선초 무신으로 위화도 회군에 참여해 1392년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한 공로로 개국 일등공신이 되고 성산백(星山伯)에 봉해졌다. 배극렴이 사망했을 당시 조정에서는 크게 애도해 증평 두타산(頭陀山) 대아봉(大雅峰)에 예장했다. 이곳은 개국공신으로 하사받은 식읍(食邑)으로 조선 초기 가장 활기찬 지역인 근서면(지금의 증평) 일대다.

고려말 조선 초기 무신으로 조선 개국은 물론 세종 때까지 조정에 기여한 인물로 곡산부원군에 책봉된 연사종의 묘소도 도안면 화성리에 있으며 도안면 도당리에는 그를 모신 사당 정후사(靖厚祠)가 있다. 조선 개국이등공신 황희석은 증평읍 죽리에 그를 모신 사당인 양무공사(襄武公祠)가 있다.

이렇듯 나라가 어지러울 때 중심을 잡고 몸을 아끼지 않은 무신들이 증평에 연고와 자취가 있다는 것은 지금의 증평군의 모습을 비춰볼 때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다. 이미 증평의 선대와 선대들의 정신은 강직하고 전략과 전술로 단련된 누구에게도 굴하지 않은 기개와 강건한 기백으로 시대를 풍미한 선조들이다. 지금 이러한 정신이 중단없이 면면히 흐르고 있어 지금의 증평을 만들어 낸 것이다.

애국지사인 연병호, 연병환, 연미당 선생 같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해 냈고, 형산강 전투의 영웅인 연제근 상사도 증평에서 태어났다. 무신들만이 증평과 인연이 있는 것이 아니다. 조선 중기 문신으로 선조때 증평(내성리)에서 태어난 다독 시인인 김득신의 정신도 지금까지 노력하는 자가 성공한다는 진리로 이어져 책 읽는 도시와 평생 학습도시를 이끌어주고 있다.

때로는 강직하게 때로는 배려하는 유연함이 있는 정서로 5000년의 유구한 역사의 중심에서 시대를 이끌어 왔던 유무형의 정신과 자산이 오늘날 증평에도 변함없이 흐르고 있기에 지금의 증평이 미래를 주도하고 도약의 시대를 이끌어 가는 핵심지역이 되는 것은 필연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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