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옥 청주시 1인1책 펴내기 강사

비가 온다. 낮부터 내리던 비는 밤이 이슥도록 그칠 줄 모르고 자박자박 겨울밤을 적시고 있다. 겨울의 끝자락이라지만 찬 계절답지 않게 순한 빗줄기는 이슥토록 창문을 두들긴다. 절기로 대한이 지났고 입춘이 머지않았으니 오늘 밤 내리는 비는 봄을 마중하는 상서로운 비라 해야 하나.

겨울날에는 그날의 기온과 날씨 변화에 따라 마음도 흔들린다. 하얀 눈이 흩날릴 때면 공연스레 설렘이 인다. 기약 없이 흘러간 세월 속에 묻혀버린 파릇하던 청춘의 날들이 선물처럼 불쑥 다시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얼토당토아니한 막연한 회상에 젖어 보기도 한다. 하늘이 땅에 닿을 만큼 짙은 구름이 내려앉은 날에는 이유 없는 우울감이 여울져 휘돌기도 한다. 바람소리에 가슴이 시려오는 차가운 밤에는 철지난 바닷가에 홀로 남겨진 것 같은 고독으로 쉽게 잠이 오질 않는다. 그러나 오늘밤 늦은 시간까지도 그치지 않고 자분자분 내리는 빗소리는 그리 싫지 않다.

뜨거운 차 한 잔을 우려내어 한 손으로 감싸 안고 베란다 화단 앞에 앉았다. 찬바람이 훅하니 폐부 깊숙이 들어왔지만 정신은 되레 맑아진다. 베란다 한구석에서 추운 날을 견디며 피워낸 게발선인장 다홍색 꽃이 전등불 아래 빛을 발하며 송이마다 영롱하다. 한여름 땡볕도, 시린 겨울날 한줄기 비추는 햇살도 알뜰하게 품은 선인장은 지난 한 해를 이렇게 살아왔노라 며 꽃으로 존재의 가치를 알리나보다. 며칠 지나면 일 년 만에 한번 피운 꽃송이를 미련 없이 뚝뚝 떨구어낼 선인장은 다시 꽃피울 그날을 기다리며 살아가겠지.

삶이란 기다림의 연속인가 보다. 어둠이 사위를 덮는 밤이면 새 아침의 동살을 기다리고 겨울의 끝자락에 서서 봄날의 훈풍을 기다린다. 오늘 밤새 내리던 비가 그치면 땅속에서 잠자던 온갖 생명들이 부스스 일어날 거라 기대하는 나의 성급함도 감히 희망이라 말해도 될까.

손에 거머쥔 뜨거운 찻잔을 입에 대려는 순간 꽃향기도 아니고 어디선가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가 차향보다 먼저 코로 스멀스멀 올라온다. 이 늦은 시간에 어느 집 밥상머리에서 된장찌개를 앞에 놓고 도란거리는 것일까. 문득 언젠가 읽었던 노천명님의 겨울밤이란 작품 속의 밤 풍경이 눈앞에 그려진다.

‘지금쯤 어느 단칸방에서는 어떤 아내가 불이 꺼지려는 질화로에다 연방 삼발이를 다시 놓아가면서 오지 뚝배기에 된장찌개를 보글보글 끓여놓고 지나가는 발소리마다 귀를 나발 통처럼 열어놓고 남편을 기다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화단에 피어난 꽃향기보다, 차향보다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에 끌리는 오늘 밤은 따뜻한 정이 있어 얼어붙은 마음을 훈훈히 녹여주는 겨울밤이 춥지 않다던 작가의 마음이 되어 본다. 그래서일까, 비 내리는 겨울밤이 주는 풍경은 더 고요하고 푸근하다. 내일 아침 우리 식탁에도 된장찌개 한 뚝배기 올려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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