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임선 시인·국제PEN한국본부 충북지역위원회 회장

요즘 주부들을 만나면 "김장했냐"는 인사로 안부를 나눈다. 이럴 때마다 뭐라 대답해야 할지 난감하다. 언제 김장할지 일정을 잡고 아이들도 부르고, 어릴 적 부모님의 김장하는 날처럼 가마솥에는 장작불을 피워 구수한 두부도 만들고. 돼지고기도 듬뿍 삶아 가까운 이웃들과 거하게 잔치하면 좋은데 아파트 생활이 그리 쉽지 않다. 단독 주택에서 아파트로 주거 방식이 바뀌면서 좋은 생활문화도 멀어져 가는 것이 아쉽다.

몇 년 전 양쪽 어깨 시술을 하고 난 후부터는 주변에서 가져다주는 김장에 부족한 만큼 절임 배추를 사다가 양념에 버무리는 것이 전부이다. 그래도 묵은김치가 아직 남아있다. 현실적으로 김장철 농산물 오르내림에 따라 그때그때 김치를 사다 먹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고 편리할 수도 있다. 여기저기 사회단체의 김장 봉사로 소외된 이웃에게 김장 나눔을 하는 따뜻한 손길을 소개하는 훈훈한 뉴스를 보면서 예전 김장 나눔 봉사하던 때가 생각이 났다.

적십자 봉사원으로 열심히 활동하던 시절 직장에 휴가를 내면서 김장 봉사에 참여했다. 추운 날 행정기관 마당에 수백 포기 배추를 절이고, 버무려 소외된 이웃에게 김장 나눔을 가면 "감사하다"는 말 대신 "김치가 맛이 없다"는 타박을 듣고 마음이 상했던 경우도 있었다. 쌀이나 라면 상자를 들고 가면 선호하는 브랜드의 라면이 아니라고 도로 가져가라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거지는 거지 될 짓만 한다"는 생각에 나도 속으로 맞받아쳤다. 대신 정말 감사하다며 과일 한 알도 공손히 전해주는 따뜻한 손길에는 눈물이 핑 돌았던 사례들도 있었다.

지난 주말 자주 왕래하던 지인의 시모상에 조문을 다녀왔다. 토요일에 김장하려고 절임 배추를 사다 놓고, 갖가지 양념도 다 해놓은 상태에서 시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단다. 급히 장례식장에 오면서 평소 친하게 지내던 이웃집에 가져가서 하라고 얘길 했는데, 정작 본인의 김장을 마무리해 김치냉장고를 가득 채웠다고 한다. 이웃사랑이 감동이라고 울먹이며 얘기를 했다. 요즘처럼 철문으로 된 아파트 현관문이 닫히면서 이웃의 정도 벽을 쌓고 사는 세상인데 보기 드문 미담이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농경사회의 생활 특성상 품앗이 문화가 발달하여 있다. 모내기, 가을 추수, 김장철 집안 애경사 등등 일상의 크고 작은 일을 협동하면서 희로애락의 정을 돈독히 하였다. 오죽하면 "멀리 있는 사촌보다 가까이 있는 이웃이 낫다"고 하지 않았던가. 핵가족화가 되면서 그런 미풍양속이 점점 사라져 가는 것이 몹시 아쉽다. 김장철이 되면 구수한 두부콩 삶는 냄새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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