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상 청주시체육회 사무국장

해마다 4월 달력 어느 날에 파란 펜으로 몇 년이라는 표시를 해 둔적이 있었다. 공직생활 몇 년이라는 표시다. 고장도 없는 저 세월은 후딱 지나가 공직생활 40여년을 마감한지도 벌써 2년째다.

고등학교 시절 대학예비고사(지금의 수능시험)를 보고나니 담임 선생님께서 공무원시험에 응시해 보는 게 어떠냐고 하시면서 응시원서를 주셨다.

초등학교를 등잔불 밑에서 공부하다 전기불도 중학교에 들어가고 나서야 들어 온 시골에서 도시로 유학을 온 나로서는 학교생활기록부 상의 장래 희망을 묻는 질문에 늘 교사, 공무원, 은행원 등이 고작이었다. 그 인연으로 부모님과는 상의도 없이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공무원 시험을 치러 가서 나중에 알았지만 형편없는 점수로 가까스로 합격을 했다. 지금으로써는 어림도 없는 점수다.

공무원이 무엇을 하는지도 급수가 뭐가 있는지도 모를 때다. 더군다나 행정직, 농업직 등 직렬은 더더욱 문외한이다. 주말마다 시골에 다니러 가는 관계로 시골에 들러서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고 부모님께 말씀드리니 "잘 되었다"고 말씀하시며 행정직이라고 말씀 드렸더니 "더 잘 됐다"고 하시며 웃으시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 아버지께서는 시골 이장 일을 맡아 보시는 관계로 일명 면서기(면사무소 근무 직원의 통칭)들과의 잦은 접촉으로 어느 정도는 공직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시던 때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시골 농가 소득으로 자식 4남매를 다 고등교육까지 공부시키기에는 힘에 겨워서 큰자식이 9급 공무원시험(그 당시는 5급 을류)에 합격했다니 부모 입장에서는 대학 보낼 형편은 어렵고 속으로 얼마나 좋아하셨나 싶기도 하다.

사실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갈 당시에 아버지는 친구 분들이 은행에 다니시는 분들이 계셔서 상업학교를 가라고 말씀하셨고 어머니는 면서기라도 해 먹으려면 인문계 고등학교를 가야한다고 말씀하시던 기억이 나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혼자 빙그레 웃기도 한다. 어머니 말씀대로 정말로 면서기가 된 것이다.

고등학교 졸업 후 우편집배원 아저씨가 전보가 왔다는 것이다. 지금이야 통신기술이 발달해서 연락수단이 다양화 됐지만 그 당시만 해도 전보만이 유일한 알림 수단이라 집안에 무슨 큰일이 있나하고 전보를 받아보니 발령지 자치단체로부터 공무원 임용되기 전 연수교육 받으라는 내용의 전보였다.

연수교육 이수 후 농사철이 시작되는 시기라 맨 먼저 시작되는 담배 농사일을 돕던 중 4월에 발령을 받아 초임지인 제천으로 갔다. 당시 청원군이 고향인 나로서는 청주시나 청원군으로 발령 나길 내심 기대했었다. 그리 큰 걱정은 안 했지만 학교생활에 이어 객지생활을 또 해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그리 썩 내키지는 않았다.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그 길로 괴산을 거쳐 청주로 기나긴 공직외길 40여년. 정말로 어쩌다 공무원이 된 것이다.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