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숙 수필가

양동이가 걸음걸이에 맞춰 엉덩이를 툭툭 친다. 당신은 신경이 쓰일 법도 한데 표정에는 변화가 없다. 그의 시선은 오직 그녀의 발걸음에 꽂혀 있다. 그녀가 걸음을 멈추면, 그는 재빨리 들고 있던 물건을 바닥에 엎어 놓는다.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그 위에 풀썩 주저앉는다.

할머니의 쉴 자리였다. 양동이는 휴대용 의자로 할아버지가 들고 다니기에 안성맞춤이다.

두 분은 잠시 몇 마디 나누는가 싶더니 다시 일어나 걸어간다. 당신도 재빨리 물건을 챙겨 뒤를 따른다. 할머니의 걸음걸이는 중풍이나 큰 병을 앓고 계신 듯 많이 불편해 보인다. 할아버지의 동행이 아니라면, 산책은 쉽지 않았으리라. 두 분의 모습이 사라진 후에도 내 시선은 오래도록 산책로에 머문다.

아이를 학교에 보낸 뒤 여유를 부리며 차를 마시던 참이다. 오늘도 두 분의 모습은 어김없이 산책로에 나타난다. 젊어서도 저리 다정하였을까. 자녀는 몇이나 두었을까. 꼭 알아야 할 일이 아니건만 궁금증이 일어난다. 부부는 자식을 키우며 서로 다른 의견으로 부딪히곤 했으리라. 또한, 생업의 고단함에 뒤척이는 가장을 보며 아내도 함께 잠들지 못한 밤이 여러 날이지 않았을까. 세월이 흘러 서로의 주름진 모습과 허약해진 몸은 고마움과 안타까움으로 다가왔으리라. 이제는 오롯이 서로만을 바라보고 지켜주는 듯 노부부의 동행이 평안해 보인다.

두 분 모습에서 젊은이들처럼 열정 넘치는 애정 표현은 보이지 않는다. 봄날 아지랑이처럼 하늘거리는 모습도 아니다.

하지만, 그 모습은 어떤 풍경보다 곱고 아름답다. 아침마다 마주하는 노부부의 모습에 바삐 떠나신 부모님을 생각한다. 두 분이 서로를 부르던 호칭이 귓전에 생생하다. 그 시절 흔한 호칭은 아니었지만, 부모님은 서로를 꼭 '자기'라고 불렀다. 친구의 부모님은 서로를 '누구누구 아버지'라든가 '어~'하고 부른다고 한다. 나는 두 분이 부르는 '자기'라는 표현이 참 좋다. 호칭만큼이나 서로를 소중히 여기던 부모님은 끝내 먼 여행길도 나란히 함께 떠났다. 부부란 마주 보는 것이 아닌 나란히 함께 가는 것이라 했던가.

노부부에게 마주 보고만 있어도 미소가 감돌던 시간은 꿈처럼 지나갔으리라. 아이들이 자라며 서로를 바라볼 여유는 점점 줄어들지 않았을까. 청춘을 지나 중년을 훌쩍 넘은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서로의 모습을 바라보게 되었으리라. 오랜 세월을 지나 마주한 두 분의 동행이 오래오래 함께하기를 기원한다.

오늘도 산책로엔 할머니의 전용 의자가 펼쳐진다. 우리의 생애 쉬어갈 의자를 펼쳐줄 동행은 누구일까. 배우자나 형제, 친구도 가능하리라. 문장가는 문학이 평생의 도반이 되리라. 먼 훗날 그대도 아름다운 노부부의 삶처럼, 정겨운 사람과 평화로운 동행이길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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