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옥 수필가

동지섣달 차가운 밤하늘에서 고요한 달빛이 쏟아져 내리고 있다.

공연의 마지막을 아름다운 바흐의 소나타 선율로 장식하듯 세밑의 차가운 밤은 유장한 달빛으로 출렁대면서 차분한 고요로 젖어 들고 있다.

세상이 온통 코로나 역병으로 짓눌려있었음에도 세월은 또 여지없이 흘러간다.

"비바람이 없어도 봄은 오고, 여름은 오고, 그대 눈물이 없어도 꽃은 피며 낙엽은 지더라."

어느 가수의 애절한 노랫말이 가슴을 파고드는 밤이다.

암울했던 한해였지만 내가 지나온 계절 중 가장 아름다운 시간으로 머물렀던 때는 어디쯤이었을까. 돌아보니 가장 찬란하다고 느끼던 시절은 사계(四季)가 아니었다. 나 자신을 진솔하게 그려내며 작품 안에서 삶의 계절들을 만들어가던 시간이었다.

지나간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 무지갯빛 추억들을 사려내며 고독을 견디어내었고 신기루 같지만 미래의 세상을 설계하면서 가슴 벅찬 희망과 긍정 에너지를 스스로 충전하지 않았던가.

참아내는 것만이 참된 것이 아님을 깨우치면서도 외로움도 고독도 종이 위에 쏟아 놓으니 비로소 가벼워질 수 있었다.

헛된 욕망과 자만도 내려놓고 성찰하며 온전한 심기를 담아내는 기다림의 그 시간들은 가장 찬란한 시간이고 내안의 아름다운 사계였다. 글을 쓰며 나를 세상 밖으로 내어 놓는다는 것은 진솔하고 겸허한 내 삶의 심지를 바로 심어 놓는 것이었기에.

올 한해를 보내며 하루를 다듬어 뿌린 씨앗들은 힘겨웠지만 내일을 향한 인생의 밑거름이 되기에 나중에라도 삶이 헛헛할 때 작은 위로가 되는 울림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내가 머문 세상 곳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또 다른 나를 이루는 이름으로 남아 때로는 누군가에게 위로의 계절이 되고 더러는 치유의 계절이 되어 함께 공감하기를 한해의 끝자락에서 겸허한 마음으로 빌어본다.

희망과 좌절이 공존하던 인생의 흔적들이 먼 훗날일지라도 꽃잎처럼 혹은 낙엽같이 세상 밖으로 나와 누군가의 공감으로 작은 위안이 된다면 올 한해를 허무하게 보냈다하여도 나는 더할 나위없는 뿌듯함으로 또 다른 사계절을 준비하리.

그러한 염원이 간절했지만 바깥생활에 제약을 받은 올해는 글쓰기가 유난히도 더디게 완성될 때가 많았다. 감정과 추억들의 조우가 주는 절정을 오래도록 붙잡고 싶어 곰삭힐 때가 많기도 했지만 자연의 신선한 공기가 주는 감성으로 정화하지 못한 아쉬움 때문이었으리.

이제는 그러한 현실 또한 나의 좋은 시절로 품어 안으려한다. 곰삭히는 것은 마구 쏟아놓은 감정의 실타래를 다시 추리는 기다림이기에 또다시 그 시절이 온 다해도 그 안에 머물고 있는 느린 시간들을 사랑하리라.

나의 찬란한 시절은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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