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로]

▶조선 명종 때 백정 임꺽정은 임거정(林巨正), 임거질정(林居叱正)이라고도 불렸다. 거질정은 '거친 놈'의 한역이다. 당시엔 백정의 아버지를 마당개, 자식을 소근개라고 했다. 그의 형 이름은 가도치(加都致)다. '가당치도 않은 놈’이란 뜻이다. 임꺽정은 왜 도적이 됐던 것일까? 황해도 봉산은 논농사가 어려운 갯벌지대였기에 갈대로 삿갓이나 밥그릇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했다. 더구나 극심한 흉년과 전염병이 닥쳐 죽은 시체가 들판에 가득했다. 하지만 권세가들은 되레 농민의 땅을 뺏고 가렴주구로 백성의 고혈을 짰다. 결국 정치만 잘했다면 임꺽정의 난이 일어날 리 없었다는 얘기다. ‘도적’ 임꺽정을 ‘의적’으로 부활시킨 사람은 충북 괴산 출신의 벽초 홍명희다.

▶연산군 때의 홍길동은 서자로 태어났다. 그는 땟거리가 없어 기한(饑寒)에 몰리자 도둑이 됐다. 활빈당을 만들어 처음에는 충주일대에서 활동했는데 관아 창고에 쌓아둔 곡식들을 전부 실어내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눠주었다. 이들이 표방했던 것은 신분과 빈부를 타파한 평등사회였다. 어찌나 위세가 놀랍던지 지방의 권농이나 유향소의 별감도 그를 알아볼 정도였다. ‘도적’ 홍길동을 ‘의적’으로 만든 사람은 허균이다. 하지만 허균 자신도 역모에 연루돼 능지처참을 당하는 신세였다.

▶숙종은 한번 잔치를 열면 열흘 동안 진탕 놀았다. 이러는 사이 한켠에선 도적떼가 생겨났다. 당시 백정, 노비 못지않게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던 부류가 광대다. 장길산은 광대 출신으로 모든 기회를 박탈당한 최하층민들을 모아 황해도 구월산에서 활동하며 부자들의 재물을 약탈했다. 신출귀몰하는 장길산 무리는 기병 5000명, 보병 1000명을 거느린 큰 세력으로 성장했다. 이들 또한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그러나 장길산은 조정의 체포 독려와 높은 현상금에도 불구하고 끝내 잡히지 않았다. ‘도적’ 장길산을 ‘의적’으로 만든 사람은 황석영이다.

▶임꺽정, 홍길동, 장길산은 조선 3대 도둑이다. 하지만 이들은 양아치가 아니었다. 이들은 관료들의 탐학, 부정부패, 수탈에 항거한 의적이었다. ‘왕이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오로지 백성’이라고 역설한 혁명가이기도 했다. 결국 백정 임꺽정, 서얼 홍길동, 광대 장길산은 스스로 도적이 된 게 아니라, 국가가 도적을 만든 셈이다. 오늘 뽑은 3952명의 권세가들이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는 ‘의적’이 될지, 아니면 자신들의 뱃구레를 채울 ‘도적’이 될지 이제 출발선에 섰다. 당선인들에게 강권하건대, 축배를 들지 말고 독배의 벼린 끝맛을 복기하길 바란다.

나재필 편집부장 najepil@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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