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양군 ‘선비충의 문화관 조성사업’ ② 면암 최익현 선생에 대한 역사적 재조명
을사5적 처단·일제 행위 비판 상소
정부에 죄목 16개조 든 장서 전달
과무10년 정읍·순창 등서 의병봉기
대한제국 진위대가 진압하려하자
전투 포기… 일제에 의해 대마도 구금
병세 위독해져 그곳에서 숨 거둬

▲ 〈최익현 초상화〉
▲ 〈최익현 초상화〉

[충청투데이 윤양수 기자] 면암 최익현 선생은 조선말기 외세 제국주의에 의한 개항을 반대한 ‘위정척사 사상’의 핵심인물이다. 최익현 선생의 일대기를 통해 최익현 선생과 그 업적을 살펴보고, 민족의 자존과 주체성을 지키기 위해 펼친 위정척사 운동을 재조명해 본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
① 선비충의 문화관을 대표 문화유산 관광지역으로 특성화
▶② 면암 최익현 선생에 대한 역사적 재조명
③ 모덕사와 면암고택의 역사적 가치와 문화재적 가치
④ 발굴된 유물들과 문화재적 가치
⑤ 선비충의 문화관 조성사업은 이렇게 진행된다

청양군에서 추진중인 ‘선비충의문화관 조성사업"의 주인공인 면암 최익현(1833.12.5 ~ 1906.11.17) 은 자는 찬겸(贊謙), 호는 면암(勉菴)으로, 조선말기에 활동했던 대표적인 위정척사론자다.

최익현은 순조 33년(1833년) 12월 5일 포천현 내북면 가채리(현,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에서 태어났으며, 14살에 이항로의 문하에 들어가 20살이 되던 6년간 이항로의 집에 기거하며 정통 성리학을 공부했다.

철종6년(1855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무원 부정자로 첫 관직생활을 시작했으며, 순강원 수봉관, 사헌부 장령, 사헌부 지평, 승정원 동부승지 등을 역임했다.

고종 3년(1866년) 병인양요를 경험하면서 당시 조정이 가지고 있던 문제점들을 시정하길 바라는 ‘병인의소’를 지었으나, 모친상으로 인해 상소를 올리지 못했다.

모친상을 마치고 사헌부 장령으로 돌아왔을 때 올린 ‘시폐(時弊)4조와 고종10년(1873년) 동부승지를 사직하며 올린 상소에서 흥선대원군의 여러 정책들을 비판한 것이 계기가 되어 흥선대원군이 정계에서 물러났으며, 이로 인해 고종의 친정(親政)정책이 시작됐다.

최익현은 이 일로 인해 왕의 아버지인 군부(君父)를 논박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형식상 제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됐다가 1875년에 풀려났다.

이후 최익현은 고종13년(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자 도끼를 들고 광화문에 나아가 조약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임금의 가마가 지나가는 길을 막았다는 이유로 흑산도로 유배를 갔다. 이후 명성황후 시해사건(을미사변)과 변복, 단발령이 내려진 것을 계기로 다시 상소를 올리기 시작했으며, 광무 9년(1905년)에는 일본에 의해 강압적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외교권을 박탈당하는 일이 일어나자 을사5적 처단과 일제의 행위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기 시작했다. 이에 최익현은 고종에게 의병을 일으킬 것을 알리는 상소를 올리고, 정부에 16개조의 죄목을 든 장서를 보낸 후 74세의 나이로 의병봉기를 결심하게 됐다.

이후 광무10년(1906년) 정읍, 순창, 곡성 등지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일으켰다.

최익현은 의병부대를 포위해 진압하러 온 부대가 일본군이 아닌 대한제국의 진위대인 것을 알고는 관군과 전투할 수 없다고 말하며, 전투를 포기하고 의병들을 해산했다. 이로 인해 체포된 최익현은 일제에 의해 대마도에 구금되었다가 병세가 위독해져 그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면암 최익현의 ‘위정척사 사상’은 개화기에 외세에 의한 개항을 반대하는 것으로 대외적 위기에 대응한 현실적인 저항이었다는 점에서 민족의 자존을 위하는 주체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재평가받고 있다. 최익현이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개항을 반대하는 5가지 이유를 살펴보면 19세기 제국주의의 양면을 간파하고 있었으며, 개항 이후 일제의 만행은 최익현이 말한 그대로 실현됐다.

그렇기에 면암 최익현의 ‘위정척사론’은 무조건적인 개화 반대가 아닌 주체적인 변화를 추구하고 제국주의 외세에 의한 개항을 반대했던 것이다.

청양=윤양수 기자 root5858@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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