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도묵 대전세종충남 경영자총협회 회장

초여름의 문턱에서 몸에 좋다는 보리굴비를 먹고 있다. 질 좋은 굴비를 사나흘 소금에 절여 보름 이상 바싹 말린 후 통보리 뒤지 속에 넣어 서너 달을 숙성시켜야 한다는 보리굴비. 숙성시켜 상품을 만들기도 어렵지만, 흔히 접하기에도 그리 만만한 음식은 아니다.

음식이 나오고 겨우 식사를 시작하려는데 텔레비전에서는 해묵은 프로그램을 내보내고 있다. 낮 방송이라 재방송을 내보내고 있는지, 혹은 코로나로 새로운 프로를 제작하는 데에 무리가 오는지는 모르겠으나 ‘미스터 트로트’에서 열세 살 정동원 군이 ‘보릿고개’를 불러 올 하트를 받는 장면이다. 어린 소년 치고는 노래가 시원시원하고 맛깔스럽다. 많은 레전드들이 기다리지 못하고 성급하게 하트를 날리고, 정작 원곡자인 진성은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다.

이 장면을 바라보다 문득 의문이 생겼다. 열세 살 소년이 ‘보릿고개’의 뜻이나 알까. 이 말속에 들어있는 한(恨)을 알지 못하고는 이 노래는 결코 부를 수 없을 것이라는 나름의 결론을 가지고 있던 터라 의문은 쉽게 내게서 물러서지 않았다.

마주 앉은 사람 역시 내가 노래 때문에 뭔가 뒤숭숭해한다는 것을 감지했는지 노래 참 잘한다며 한마디 거든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했으나 초등학교에 다니는 소년이 이 말의 뜻을 알까 하는 의문은 내게 찰거머리처럼 떠나질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사무실에 들어올 때까지 ‘보릿고개’는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마을에서 한두 집을 빼고는 어느 집이든 보릿고개를 견뎌야 했다. 대부분 가을에 수확한 곡식으로는 초여름 보리를 수확할 때까지의 식량이 되지 못해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소나무 껍질을 벗기고, 칡뿌리를 캤다. 이때는 먹을 것이 없어서 속담에서도 ‘대추나무 움틀 때엔 딸네 집에 가지 마라’고 했다. 이 어려운 시기를 ‘보릿고개’라 한다.

그 옛날 시골에서 접했던 춘궁기의 기억이 너무도 생생하게 나를 압도한다. 남의 땅에 소작하고 소작료와 빚, 이자, 세금, 경작 경비 등을 다 제하고 나면 별로 남는 게 없던 시절의 이야기다. 한여름 내내 뙤약볕에서 일하고 가을 추수를 해 이 경비 저 경비 다 떼고 남은 식량으로 겨울을 넘겨야 한다. 언제나 부족한 식량에 어쩔 수 없이 부잣집에 가서 한 배 반의 이자까지 치르면서 지게에 쌀 한 가마를 지고 오기 일쑤다. 추수를 마치고 일곱 달을 견뎌야 하는 긴 여정은 주부의 지혜가 발휘돼야 하는 기간이다. 고구마로 한 끼를 때우고, 활동 시간이 짧은 겨울은 두 끼로 만족해야 했다.

말이야 좋게 조석(朝夕)이라 하고 점심에는 마음에 점만 찍으면 된다며 자위했다. 어쩌다 기회가 되어 낮에 푸짐하게 식사하면 양심상 ‘낮밥’이라 구분하고 ‘점심’이란 말은 사용하지 않았다. 요즘은 이때처럼 먹거리가 없어 굶는다는 소리를 여간해서는 듣지 않는다. 오히려 그 소중했던 보리가 굴비를 숙성시키는 보조재료로 전락하여 활용되고 있다 하니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집에 와서 차분히 동원 군의 ‘보릿고개’를 다시 들어 본다. 어린 학생이 참으로 구성지게 부르는 소리는 매끄럽게 흘러가지만 영 내 마음엔 아쉬움이 지워지지 않는다. 원곡자인 진성의 노래를 찾아 듣는다. 역시 목소리의 밑바닥에 한의 앙금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보릿고개’는 우리 민족의 한이 깊이 깔려야 제맛을 내는가 보다. 이런 판단 역시 나의 선입견인지 모른다. 나만이 갖는 감정이라 탓해도 나는 보릿고개의 기억을 내려놓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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