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우 전 충남교육청 장학관

고금을 막론하고 지도자들의 가치관과 행동은 국가 흥망에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이들이 부패하면 국가는 대내외적으로 흔들리게 되고 민중은 의욕을 포기하거나 저항하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정치, 경제, 교육, 병영 등 사회 각 분야의 지도자들에게는 엄격한 도덕적, 공공적, 모범적, 준법적, 금욕적 잣대가 요구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다.

 초려 이유태 선생의 상소문 기해봉사에는 지도계층이 이렇게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내용으로 가득 담겨 있다.

 상소문 문화는 동양 제국(諸國)이 가진 인류의 값진 자산이다.

 상소문을 통해 전달한 그때그때의 상황보고야 당연한 것이고, 왕에게 아부 아첨하는 말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에 담긴 쓴 소리야 말로 한 사람의 목숨을 건 처절한 몸짓이었다.

 그만큼 상소문의 한마디 한마디는 사소한 이야기가 아니라 한 사람의, 조직의, 국가의 성쇠가 매인 소중한 생명의 소리였던 것이다.

 나라를 위해 정책을 제시해 달라는 효종의 부탁을 받고 쓴 기해봉사는 무려 4만자에 달하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장(最長)의 상소문으로 그 자체가 값진 정신문화유산이다.

 우리나라 상소문의 꽃은 율곡 이이 선생이 쓴 만언봉사 즉 갑술봉사라 할 수 있다.

 선조가 이글을 읽고 국정을 다시 돌아보고 민생을 더욱 챙기게 되었음은 바람직한 일이다. 이러한 율곡의 갑술봉사는 인사 문제를 중심으로 국정을 논하고 있다.

 초려의 기해봉사는 길이가 4만자에 달했던 만큼 인사 문제를 비롯해 국가조직, 교육, 세금, 군대, 토지, 사회제도와 문화 등 모든 면을 망라한 국정의 전반을 다루고 있다.

 국가의 굵직한 큰일이야 쉽게 접할 수 있었겠지만, 그런데 기해봉사를 보면 언론뉴스가 없던 그 시절에 어떻게 전국방방곡곡 각 분야의 세세한 일까지 인지하고 있었는지 놀랍기만 하다.

 아마 저장용량이 오늘날의 슈퍼컴퓨터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기해봉사는 국정의 모든 분야에서 나타타는 문제점을 분석하며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중국의 요순시대를 유토피아로 보고, 이를 기본으로 하여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후의 국가적 피폐상황을 극복하여 이상사회를 이루고, 미래의 북벌을 추진하기 위해 사회 각 분야에서 변하고 바뀌어야 하는 쇄신안을 밝히고 있다.

 그리하여 초려의 기해봉사는 율곡의 갑술봉사를 교과서로 하여 나왔지만 4배의 길이로 국정의 쇄신안을 밝힌 청출어람청어람(靑出於藍靑於藍)의 관계로 보여 진다.

 특별히 기해봉사에는 '유위(有爲)'라는 단어가 20회 가까이 나오는데 이를 주목해야 한다. 사전적 의미야 물론 할 일이 있음, 또는 능력이나 쓸모가 있음 정도이겠지만, 이글에서는 국가정책을 추진함, 또는 국정을 운영함이라는 특별한 의미로 쓰였다.

 특히 "북벌정책을 추진하다"라는 말을 하고 싶은 자리에는 반드시 이 단어가 쓰여 있다.

 조정의 다수가 친청파로 가득 차 있던 조정에서 북벌이란 단어는 비밀로 통해야 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효종의 북벌계획을 1650년에 김자점이 청나라에 밀고하여 탄로나기도 하였고, 이에 청나라는 10차례에 걸쳐 조사를 나왔다는 기록이 있다.

 그만큼 북벌이란 단어는 국가 존망이 달려 있던 만큼 대놓고 말하기는 어려웠던 시기였다.

 기해봉사의 가장 핵심이 되는 기조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다.

 국가의 최고지도자라는 왕을 비롯하여 신하들이 엄정하고 공적인 태도와 솔선수범, 위민정신, 준법태도, 사치배제, 절약과 검소함을 지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왕과 왕실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로는 수기(修己)와, 엄궁금(嚴宮禁), 숭절검(崇節儉)을 중시하고 있다. 수기를 7단계로 제시했으며, 엄궁금은 궁궐에서 엄격하게 금해야 할 것으로 편사(偏私)를 없애어 공명(公明)하게 임하고 예법(禮法)으로 제어하는 것이다. 숭절검은 절약과 검소를 숭배하여 사치와 방탕을 배척하고 덕의(德義)를 지켜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왕실의 권력남용과 왕실살림살이인 내수(內需)의 위법행태를 철저히 단속하도록 하였다.

 조정의 권신들에건 강력한 도덕적 규율과 법칙 준수를 강조하였다. 부세(賦稅), 병사(兵事), 인역(人役), 양전(量田) 등 각종 업무에서 공정성을 주장하였고, 쓸데없는 관리인 용관(冗官)의 도태를 주장하였다. 각종 탈법과 위법 사례를 세세히 제시하고 봉공망사(奉公亡私)의 자세를 요구하였다. 금치습(禁侈習)이라 하여 사치를 배격하고 이를 지키지 못하면 나라가 나라답지 못할 것[國不爲國矣]이라 하였다.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