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윤수 대전을지대학교병원 권역외상센터 외과 교수

15년 전 전공의 시절 일이지만 기억이 생생하다. 부스스한 머리와 퉁퉁 부은 얼굴로 중환자실 환자 옆 침대에 책을 놓고 꾸벅 졸고 있다. 나와 함께 전공의 일을 하는 동기 모습이다. 이 친구는 상태가 악화되고 있는 환자 옆을 밤새 지켰다. 믹스커피 한잔을 타서 친구에게 건넸다. “너 덕분에 환자가 하루 넘겼다. 금방 좋아지겠지!” 의사는 환자 곁에 있어야 의사이다. 당직실에서 전화기 넘어 들려오는 누군가 불러주는 수치와 모니터 화면에 보이는 환자 혈액검사, X-ray 사진 만으로 환자를 살릴 수 없다. 친구는 환자 옆에서 환자 숨소리, 눈빛 하나까지 보며 환자를 치료하고 있다. 때로는 환자 상태가 악화되어 소변양이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소변 한 방울이라도 나오게 하려고 소변 줄을 쥐어짜는 친구 모습이 보였다.

대학병원 환자에겐 담당 교수, 그리고 담당 전공의가 있다. 최근 부족한 전공의로 인해 담당 교수만 있는 경우가 있지만, 내가 수련 받던 시절엔 상태가 안 좋은 환자를 지키는 전공의가 있었다. 나도 그런 역할을 했다. 전공의는 환자 옆을 떠나지 않았다. 지금은 그 역할을 전문의가 대신하고 있다. 어느 병원은 호스피탈리스트란 이름으로 전문의를 채용해 이전에 전공의가 하는 일을 맡기고 있다. 하지만 이는 임시방편이며 근본적 해결책은 충분한 의료 인력이 환자 치료에 집중해야 한다. 이야기는 인력과 의료 수가, 더 나아가 모순된 우리 의료 현실까지 말해야지만 이는 그 누구도 나서서 바로 잡기는 어려운 지경까지 와있다.

우리가 잘못알고 있는 손자병법이란 책에서 대표적인 구절이 ‘지피지기 백전백승’이다.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 백번 승리한다는 말이다. 무심코 들어서는 고개를 끄덕이는 말이지만 실상은 잘못 와전된 말이다. 상대와 나를 모두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지피지기 백전불태’ 말이 바른 문구이다. 위태롭지 않다는 말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위태롭지 않다고 강조한다. 이 말을 중환자를 치료한다는 경우에 적용한다면 환자가 고비를 버티고 위태롭지 않으면 결국 환자는 살아날 수 있고 이는 곧 환자가 이기며 살아나는 것을 말한다. 환자가 위태롭지 않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것이 주치의 믿음과 도움이다. 지금도 환자 침대 위로는 환자 이름과 동시에 주치의 이름이 적어있다. 이는 곳 환자와 담당 의사는 한 배를 탔다는 것을 말한다. 정확히는 환자, 담당 의사, 전공의, 담당 간호사 모두다 환자 치료에 같은 마음이 되어야 한다.

전공의 특별법이란 족쇄에 갇혀 주당 80시간이란 근무로 옥매여 지금의 전공의들은 산다. 환자에게는 환자 치료를 담당하는 의사 임무를 시간으로 한정했고, 역으로 전공의들은 근로기준법에 절대 맞지 않는 기준의 일을 한다는 코걸이를 해버린 결과이다. 이는 곳 환자들에 피해가 간다. 환자가 인계 대상이 되었다. 내 근무시간만 치료 대상으로 보는 일부 의료진들이 현실이다. 주치의의 연속적인 환자 치료, 관리가 아니라, 내 시간에만 내 환자가 되었다. 보고 듣고 촉진하며 타진해서 환자의 아픈 증상을 알아내고 진찰을 하라고 분명히 의과대학 6년 교과과정에서 수없이 배우고 있다. 환자를 의사 손으로 눈과 몸, 청진기로 진료하지 않고 마우스와 모니터로 환자를 보는 현재 상황들, 이것은 현실이고 지금 세태이다. 새로운 의료기술, 신약들은 더 발전이 되었으나, 의료진 손길, 주치의 손은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환자 옆을 지키며 가만히 보면 길이 보인다. 그 길을 찾아가면 환자가 살아나갈 길이 보인다. 주치의가 환자 곁은 지켜주어야 이는 곳 환자가 위태롭지 않고 살 수 있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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