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윤수 대전을지대학교병원 권역외상센터 외과 교수

내가 살아온 길지 않은 시간 중 절반 넘게 이어진 인연이 있다. 내 스스로 선택한 ‘어쩌다 22년’ 인연인 곳을 다녀왔다. 희망진료소라는 곳이다. ‘의료 서비스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대전역 인근의 노숙인과 쪽방생활인 등 의료 소외계층’을 위한 공간이다. 처음 시작한 1999년에는 지하 공간에서 바구니와 간이 책상들 몇 개로 시작해 이제 어엿한 진료실 책상, 약 조제실까지 갖춘 공간으로 변했다. 번듯한 도심 의료기관만은 못하지만, 열정을 가진 봉사자들과 정성스런 시설의 상주 직원들의 마음만은 어느 의료기관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물론 이 공간에 내가 직접 가서 나눔에 나는 아주 작은 도움 밖에 하지 못한다. 두세 달에 한 번씩 직접 가서 진료한다. 여러 선생님들과 자원봉사자들, 그리고 내가 오래전 했던 것 같이 학생들이 함께 힘을 더해 잘 운영되고 있다.

지금도 멋모르던 의과대학 시절 처음 시작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약통이 가지런히 담긴 바구니가 놓인 책상 주위로 나와 몇몇 학생들이 모여 있다. 저기 몇 미터 떨어진 곳에는 의학과 선배가 예진을 하고 있다. 청진기를 귀에 꽂고 수은혈압계로 능숙하게 혈압 재는 모습을 과연 몇 년 뒤 내가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트에 각종 의학용어를 술술 적어 예진하는 모습이 너무나 멋있어 보이기까지 했다. 본과 학생이 예진하고 이어 선생님께서 본 진료를 하신다. 마지막은 나와 같은 1-2학년 학생이 약을 조제하는 과정이다. 이 모든 진료 과정을 총괄하시는 선생님의 지도, 감독 하에 이루어진다. 최근 약사 선생님들까지 이곳 희망진료소에 참여해서 보다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의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오늘도 조그만 내 능력을 베풀러 갔다가 더 큰 것들을 감사히 배우고 왔다. 평일 저녁시간 편히 집에서 쉬고 싶은 생각도 있지만 역시나 사람은 남을 위해 무언가 해줄 수 있다는 자체가 보람이고 내 자신이 살아 있다고 느낀다. 언제나 이곳에 들러 몇 시간이 지나고 나면 책에 나오지 않는 무언가 많이 배우고 돌아간다. 내가 한 것은 ‘감기에 따뜻한 물 많이 드세요’ ‘혈당, 혈압이 잘 조절됩니다.’ ‘안녕히 잘 들어가세요.’ 라고 말씀해드리며 전과 동일한 약 처방해드리는 것이 전부이다. 그러나 항상 감사의 말과 함께 나를 향해 92도 각도로 인사해주시고 가는 분들이다.

이십 년이면 강산이 두 번이 변하고 대통령도 서너 번 바뀌었다. 처음 이곳에 발 내딛은 후 대전역 인근도 많은 변화가 있다. 대전역사가 더 크고 웅장하게 변했지만 오히려 주변 쪽방촌은 더 열악해졌다. 그러나 이제 세금이 제대로 쓰이는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대전역 쪽방촌 도시재생뉴딜사업이다. 이전 희망진료소 자리를 포함한 인근이 허물어지고 뉴딜이란 이름 붙여 새로운 건물이 들어설 예정이다. 다음 강산이 변해도 내가 하는 이 활동은 계속 이어지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측해본다. 이십년 전 갖었던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면 나는 앞으로도 같은 마음으로 살 것이다. 혼자만의 생각으로 이곳이 결국 없어져야 보다 나은 나라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야 뭐 조그마한 도움밖에 못하지만 사회 모두가 한번쯤 이곳에 찾아오는 사람을 줄이는 대안을 찾아야 한다. 대전역 인근 도시재생뉴딜사업이 건물 짓는 것에서 끝나지 말고 의료 서비스 사각지대에 있는 의료소외계층까지 줄여주기 기대한다. 정상적인 사회 지도층이라면 꼼수를 써서 병가내고 해외여행을 버젓이 가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내가 다녀온 이곳같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없어지는 대안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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