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길 충남교육청연구정보원 진로진학부장

한 아이가 내게 왔다. 정현종 시인의 시처럼 한 사람이 온다는 것은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가 함께 오기 때문’에 새내기 교사인 나는 그 아이를 맡는 게 두려웠다.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 봄. 펄럭이던 오륜기보다 화려하게 등장한 아이는 기수(가명)였다. 같은 고등학교에서 두 번 제적당하고 세 번째 입학이라 선생님들의 반대가 많았다. 교장선생님의 부탁으로 기수는 우리 반이 됐다. 기수는 동급생보다 나이가 서너 살 많았고 세상 밖 경험도 갓 사회에 첫발을 딛는 나보다 많았을 것이다. 작지만 어딘가 강단져 보이는 아이였다.

아무 사고 없이 1학년만 마치고 올려보내는 것이 내 목표였다. 너무 집중해서 관심을 보이면 부담스러워할 것 같아 다른 학생들과 똑같이 대했다. 어떤 때는 일부러 무심한 척도 했다. 그러던 중 기수와 마음으로 가까워지는 일이 일어났다. 학급 단합대회가 있던 토요일. 기수와 급우들이 한참 축구를 하던 중이었다. 그때 교문으로 오토바이를 탄 어딘지 모르게 거칠어 보이는 여러 명의 아이가 들어왔다. 아이들은 기수 생일이라 왔다고 했다. 찾아온 것은 고맙지만 오늘은 나와 우리 반 학생들의 행사이니 돌아가 달라고 돌려보냈다. 단합대회를 마치고 생일 축하를 해주기 위해 학교 앞 닭갈빗집으로 기수를 데려갔다. 우리는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눴다. 아버지에게 억눌린 이야기, 중학교 때 담임에게 상처받고 가출했던 일, 두 번의 제적, 입대가 두려워서 재입학하게 되었다는 것까지 알게 됐다. 어린 가슴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크나큰 상처였다. 그 아픔을 어찌 견뎠을지. 이야기를 듣는 동안 가슴이 먹먹했고 다시 학교로 온 기수가 고마웠다. 고등학생이지만 성년의 나이인 기수에게 막걸리를 한잔 건넸다. 그날 우리는 잔을 부딪치며 교사와 학생이 아닌 고단한 삶의 길을 함께 걸어가는 길벗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날 이후 기수는 내가 숙직을 서는 날 집에 가지 않고 나보다 앞서 문단속도 해주었다. 외진 곳에 있는 학교라 가끔 좀도둑이 들기도 했는데 기수 덕분에 나는 든든한 숙직 동지를 얻은 셈이었다. 기수 어머니는 아들이 학교에 잘 적응하는 것 같아서 내 곁에 있는 것을 좋아하셨다. 기수는 점차 학교에 적응했을 뿐만 아니라 학교생활을 즐거워했다.

물론 기수가 완벽하게 학교생활을 한 것은 아니었다. 장날 읍내에 나가 막걸리를 먹고 들어와 오토바이로 운동장 경사진 시멘트 계단을 오르는 묘기로 수업 중인 전교생을 환호하게 했고 나는 빈 교실을 찾아 기수가 술에서 깨도록 도와야 했다. 가끔은 불량배들에 시달려 마음이 흔들렸고 집을 나와 술에 취해 전화하는 날도 많았다. 기수를 집으로 데려와 같이 자고 봉고차로 함께 출근과 등교를 하던 날도 몇 차례 있었다.

기수는 우여곡절 끝에 직업위탁과정을 거쳐 졸업했다. 1학년까지만 담임을 하려던 처음 마음과 달리 나는 3년 동안 기수의 담임이었다. 아니 나에게 기수는 벗이었다. 교사로서 첫 마음을 잘 가지도록 이끌어준 스승이자 친구였다. 돌아보면 내가 학생들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나를 이끌어준 시간이었던 것 같다.

스승의 날이 다가온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함께 데려오는 학생들을 교사들은 만나고 있다. 교사들 마음의 무게를 조금은 안다. 그 무게를 감당하며 학생들과 함께 길을 걸어가는 선생님들을 응원하고 싶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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