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호 금산문화원장

보석사로 가는 길은 초입부터 남다르다. 일주문을 지나기 전 멋들어지게 굽이굽이 휘어진 두 그루의 소나무가 방문객에게 인사라도 하듯이 땅에 허리를 숙이고 있으며 일주문을 지나면 왼쪽으로 왜란 때 의병승장(義兵僧將)으로 중봉 조헌 선생과 금산전투에서 순절하신 기허당 영규대사의 순절사적비가 무서운 칼바람을 견디며 서 있는데 보석사 가는 길을 더욱 더 경건하게 한다.

보석사 가는 오솔길은 가을에는 길 위의 노란 은행잎으로 인해 황금 밭을 걷는 듯하고, 겨울은 소복이 쌓인 눈과 푸른 소나무들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매번 느끼는 일이지만 이 길을 걸을 때면 알 수 없는 자연의 상쾌한 기운이 내 몸에 스며들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한 걸음 두 걸음 소나무 길이 끝날 즈음 왼편으로 기괴하고 장대한 나무가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이 나무가 바로 보석사의 은행나무이다. 이 은행나무는 1500년 정도 되었다고 하는데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 마다 큰 나뭇가지가 굉음을 내며 부러졌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 때문인지 그 모습이 사뭇 더 장대하고 신령스런 모습으로 다가온다.

보석사는 신라 헌강왕 11년인 885년 조구대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창건 당시 절 앞에서 캐낸 금으로 불상을 만들었기 때문에 절 이름을 보석사라 하였다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조선 고종 때 명성황후가 다시 세웠다.

일제 강점기인 1912년에는 한국불교 31본산의 하나가 돼 전라북도 일원의 33개의 말사를 관장했다.

보석사의 대웅전에는 우직하게 써넣은 현판이 하나 걸려 있는데 이 글은 조선후기의 서예가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1770~1847)이 쓴 글씨이다. 창암의 첫 이름은 奎奐(규환)이었는데 살림이 넉넉한 가정에서 자라났다.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글씨 쓰기에 몰두해 살림이 어렵게 되자 학문, 교유, 혼인이 자연히 늦어졌다. 이런 이유로 그는 3가지가 모두 늦었다 해 三晩(삼만)이라 개명했다. 자는 允遠(윤원)이요, 호는 젊었을 때는 强巖(강암)이라고도 했으나 중년에 蒼巖(창암)으로 바꾸었다.

그의 나이 24세 때 부친이 독사에 물린 여독으로 세상을 뜨게 되자 뱀이란 뱀은 보는 대로 잡아 죽였다. 사람들은 뱀막이로 ‘李三晩’이라는 방을 써서 집에 붙여 놓았다. 그 방을 붙이면 뱀이 얼씬도 하지 않았다는 일화가 있다.

그는 사대부의 집안에서 태어나지 못해 이력이나 경력이 화려하지 못했어도 그의 명성은 생존 당시 명필로 이름을 날렸다.

그의 이름이 알려진 데에는 상인들과의 인연 덕이었다. 사람들에게 글씨를 가르쳐주고 있었던 창암에게 우연히 전주에 와있던 사람이 장부 써 주기를 부탁해서 써줬고, 그 장사꾼이 장부을 가지고 고향에 돌아가 글씨를 감정하는 사람에게 보였더니 창암이 써준 글을 보고 “명필이다”라며 깜짝 놀랐다. 이후 전국방방곡곡을 누비는 장사꾼들 사이에서는 창암의 글씨가 조선 제일의 명필로 통했다.

보석사의 현판글씨는 그가 쓴 현판 중에서도 아주 뛰어난 것으로서 창암이 한창 필력이 오를 때의 힘찬 글씨이다. 창암 같은 대가의 글씨가 금산에 떡 버티고 있는 것을 보면 여간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도 동국진체의 맥을 잇고 있는 가장 한국적인 글씨라 더욱 더 정겹게 느껴진다.

보석사 오솔길을 걸으며 상쾌하게 몸과 마음을 다스리고 옛 유적을 살펴보며 잠시 숨을 돌리며 생각해본다. 자라나는 이들을 위해 우리의 문화유산을 소중히 생각하고, 지키며, 보존하고 알리는 일에 더욱 더 정진해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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