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법무부장관 후보자 논란이 잦아들 줄을 모르고 있다.

가장 먼저 불이 붙은 것이 조 후보자 딸의 입시와 관련된 의심들이었다. 외고를 졸업하고 고려대를 나와 의전원으로 들어가는 코스에 어떤 특혜나 비리가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비리까지는 아니더라도 소위 가진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코스를 이용해 자녀를 사회 상층부로 쉽게 진입시킨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었다. 이른바 조국의 ‘스카이 캐슬’.

자녀 입시 관련한 의혹에 대해선 판단을 유보하자. 문제제기 초기와는 달리, 입시과정에서 크게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는 내용의 보도도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그것보다는 이번 논란을 보면서 한동안 잊고 있다가, 다시금 깨달은 점이 있다. 조 후보자 살고 있는 세계가 나와는 전혀 다른 곳이라는 점이다.

조 후보 자녀가 입시과정에서 쏟아 부은 노력을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다. 하지만 그 과정이 보통의 사람들은 접근 가능성조차 생각도 해볼 수 없는 것이라는 점 또한 변치 않는 사실. 그들만의 ‘스카이 캐슬’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조 후보자뿐만이 아니라, 진보-보수 가릴 것 없이 이 사회 기득권이 살고 있는 성이다.

오늘은 그 성 밖에서 아등바등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주인공은 40여년 경력의 목수인 노인 다니엘 블레이크. 배경은 영국이다. 심장병이 악화해 더 이상 일을 하기 어려워진 주인공은 질병 수당을 신청하지만, 담당 기관은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반려한다.

대신 실업수당을 신청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다니며 절차를 밟아보지만 진행은 더딜 뿐. 이 글에서는 ‘이런저런’ ‘이곳저곳’으로 짧게 표현했지만, 실제 영화엔 보는 사람조차 암에 걸릴 정도로 짜증스러운 절차와 질문들이 이어진다. 주인공 다니엘의 인내심과 얼마 남지 않은 재산과, 그의 건강이 바닥날 때까지 말이다.

이 영화가 가슴 아픈 점은 주인공이 기득권들의 성 안으로 진입하기 위해 투쟁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니엘이 원했던 것은 단지 남은 인생을 살아가기 위한 약간의 지원뿐이었다. 하지만 정부의 관료 조직은 그에게 모욕만을 줄 뿐이었다. 관료 조직이 성 밖의 사람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그들 역시 기득권을 위해 복무하는 집단일 뿐이라는 인상을 받게 된다.

영화의 조연으로 싱글맘 케이티와 그녀의 두 아이들이 등장한다. 실업급여 지원기관에서 다니엘이 도움을 준 계기로 서로 의지하며 지내게 된다. 변변한 직장이 없었던 케이티 역시 주인공 다니엘과 마찬가지로 ‘이런저런’과 ‘이곳저곳’을 당했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녀의 아이들 또한 앞으로 비슷한 상황에 놓이게 되고, 성 안으로 진입은 아마도 정말 어려울 것이다. 이는 비단 영국만의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서 있는 곳이 다르면 보이는 풍경도 다르다고 했다. 보이는 것이 다르면,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다를 것이다. 우리 사회는 크게 보면 정치적으로 왼쪽과 오른쪽, 경제적으로는 위와 아래로 나뉘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조금 과할 수 있지만 도식화 해보자면 조 후보자를 비롯한 여권과 진보진영 기득권들은 왼쪽-위에 서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왼쪽-위에 위치한 사람들은 과연 자신들의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과 가까울까, 아니면 아랫쪽에 있는 사람과 가까울까. 이번 조 후보자 논란을 보면서 다시 한번 질문해본다. 성 밖의 아래쪽에서 까마득한 위쪽을 보면, 가끔은 왼쪽과 오른쪽이 크게 차이나지 않아 보일 때가 많다.

스포일러지만 영화의 결말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주인공 다니엘은 성 안으로부터 도움을 받게 되려는 순간, 안타깝게도 지병이었던 심장마비로 죽음을 맞이한다. 우리 사회의 윗분들도 무언가 사회를 위한 변화를 시도 하고 있다면 조금 더 서두를 필요가 있겠다. 영영 늦어버리기 전에.

안형준 기자 ahn@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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