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사 글, 임용운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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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부 愼言牌와 承命牌
甲子士禍(18)


"음, 사홍이 야인(野人)이면서도 국록을 먹는 신하보다 충성심이 많구나. 어떤 자는 시집 안간 서녀(庶女)도 안 바치려고 임금을 속이고 업신여기는데, 사홍이 출가녀를 기꺼이 바치니 어찌 가상한 일이 아닌가."

왕은 임씨의 친정아버지 임서홍을 칭찬하며 다시 임씨의 손을 잡고 수작을 하였다.

임사홍은 종실 보성군의 사위로서 자녀들이 모두 국혼(國婚)을 하거나 종실과 인척을 맺었다.

이미 죽은 맏아들 광재는 예종의 딸 현숙공주를 상(尙)하여 풍천위(豊川尉)가 되었고, 둘째 아들 풍원위 숭재는 성종의 딸 휘숙옹주를 상하였으며, 셋째 아들 희재(熙載)는 세종의 아들인 영응대군의 외손서(外孫壻)요, 딸 임씨는 종실 문성정 상의 부인이었다. 임사홍은 그 자신이 종실의 사위일 뿐 아니라 두 아들이 부마였기 때문에 척리(戚里)로서의 세력은 컸었다. 그러나 위인이 간사하고 교활하여 유자광, 박효원(朴孝元) 등과 붕당을 만들어 정적(政敵)을 모략하고 정사를 어지럽히니 대간과 뜻 있는 신하들이 그를 소인이라 배척하였다.

성종이 나라의 사돈인 임사홍을 구하려 했으나 종실 주계정(朱溪正) 심원(沈源)이 그의 고모부 되는 임사홍이 장차 국정을 크게 그르칠 간흉(奸凶)임을 간하매 성종은 드디어 그를 파직시키고 금고(禁錮)하여 벼슬길을 막아버렸던 것이다.

왕이 등극한 후 임사홍은 왕의 매부요, 총신(寵臣)인 숭재를 시켜 자기의 전비(前非)를 변명하고 다시 등용될 길을 모색하였다.

왕이 임사홍에게 옛날의 자급(資級)을 다시 주려 하였으나 대간이 맹렬히 반대하는데다 마침 때맞추어 터진 무오사화에 셋째 아들 희재가 연루(連累)되어 임사홍의 환로(宦路)는 다시 막히고 말았다.

그러나 임사홍은 단념하지 않았다. 그는 성종이 왕비 윤씨를 폐위시킬 때 승지로 있으면서 폐비 처분의 불가함을 울며 간한 일이 있었는데 언젠가 기어코 왕에게 폐비 사건을 전말(顚末)을 고하고 권토중래(捲土重來)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그가 출가한 딸을 왕에게 향락의 제물로 바친 것도 진즉에 음모된 계략으로 자연스럽게 왕에게 접촉할 기회를 얻으려는 술수였던 것이다.

"너도 먹고, 또 술을 부어라. 내 뜻하지 않게 화용월태의 미인을 만났으니 술에 취하고 은유향에 취하리라."

왕은 금방 비워낸 술잔을 임씨의 손에 쥐어 주었다.

"겨우 면추(免醜)나 된 신첩을 하용월태라 과찬하오시니 오히려 부끄럽사옵니다."

임씨는 구변도 좋게 응구첩대하며 고개를 돌리고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아니야, 지아비가 누군지 모르지만 염복(艶福)이 있는 사람일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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