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거리는 청춘의 거리 청춘의 거리에는 건설이 있네/ 역마차 소리도 흥겨로워라 시민의 합창곡이 우렁차구나/ 너도 나도 부르자 건설의 노래 다 같이 부르자 서울의 노래/ SEOUL SEOUL 럭키 서울’

1970년대로 기억한다. 어릴 적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럭키 서울’이란 제목의 노래를 흥얼거리고 따라 부르곤 했다.

이 노래를 부른 고(故) 현인의 목소리는 국민들에게 ‘희망’을 불어 넣기에 충분했다.

당시 시대 상황이 그랬다. 개발도상국이었던 한국이 급속한 성장 과정을 밟으면서 모든 인적·물적 자원이 서울로 집중됐다.

젊은이들은 돈을 벌기 위해 서울로 모여 들었고, 하루가 다르게 급속하게 변화하는 서울 거리엔 ‘건설의 노래’가 끊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럭키 서울이었다. 그리고 30여 년이 지난 지금, 새로운 ‘럭키 서울’이 울려 퍼지고 있다. 여기저기에서 “서울의 경쟁력을 살려야만 대한민국이 성장할 수 있다”는 ‘서울 찬가’가 들려온다. 미래는 국가 대 국가 간 대결보다 서울 대 상해, 서울 대 뉴욕 등 도시 간의 경쟁이 더 중요하다고 강변한다. 서울이 국제기준에 걸맞은 도시경쟁력을 키운다면 서울의 혜택이 전국으로 퍼져 대한민국을 먹여살리게 된다는 논리다. 세종시도 같은 맥락이란다.

행정부처가 둘로 쪼개지면 효율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안 된다고 한다. 국내외적으로 긴박한 상황이 하루에도 몇 번씩 벌어지고 이를 신속히 대처하기 위해 수시로 장·차관들이 모여 논의를 해야 하는데 어떻게 행정부처를 세종시로 내려 보낼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뭔가 빠진 듯하다. 당초 세종시의 추진 의도나 충청인과의 약속은 온데간데 없어졌다. 참여정부가 만든 세종시 건설의 핵심은 대한민국의 병폐로 손꼽히던 일극 집중화와 찌들어 있는 중심주의를 벗어나려는 몸부림이었다. 과거 ‘서울’만 외치다보니 모든 것이 서울에만 집중됐고, 이로 인한 폐해를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렵게 됐기 때문이었다.

서울을 이대로 방치하면 지방의 고사는 물론, 서울마저 심각한 문제에 봉착하게 될 것이라는 위기감에서였다. 고심 끝에 전국이 고루 잘사는 방안으로 세종시를 만들어 낸 것이다. 몸에 붙은 암덩어리를 떼어내자는 처방이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에선 세종시가 잘못된 정책이라고 한다. 기존의 서울 예찬론이 맞단다. 논리의 반전이 아닐 수 없다. 참여정부가 ‘암덩어리’라고 지목한 것이 이제와선 그 때문에 우리가 먹고 산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그래서 서울에 있는 것은 하나도 나눠줄 수도 줘서도 안 된다고 한다. 여기서 세종시 논란을 겪으면서 국민을 더욱 서글프게 하는 것은 지독한 서울 중심 사고 방식을 목격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서울의 기득권을 지켜내기 위해 모든 걸 버릴 수 있다는 듯한 태도 속에서 ‘서울 사람’이 아니면 ‘대한민국 사람’이 아니라는 현실은 견디기 힘들게 한다. 서울이 있는 것은 절대 뺄 수 없으니 ‘이거나 먹고 살라’는 식으로 각종 기업들을 세종시에 집어 넣겠다고 하는 것은 불쾌한 감정을 더욱 자극한다. 어찌보면 우리도 대한민국 사람이고, 지극히 정당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절규가 녹아 있을지도 모른다. ‘서울의 거리는 청춘의 거리 청춘의 거리에는 건설이 있네’라는 현인의 노래가 슬프게 들리는 것도 이런 까닭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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