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완 前 충남행정부지사

도산 안창호 선생은 독립운동가로서 대표적인 분일 뿐 아니라 대한민국 역사에서 꼭 기억해야 할 분이다.

도산은 1902년 갓 결혼한 아내 이혜련 여사와 미국 유학을 위해 샌프란시스코에 발을 디뎠는데, 현지 동포들의 처지가 비참했다. 미국인들은 한국인에게 세를 주지 않으려고 했다. 떠들며 싸우고 지저분하였던 까닭이었다. 미국 땅에서 천대받고 무시되는 동포들을 두고 자신만 공부할 수 없다고 생각한 도산은 현지 동지들과 친목계를 조직했다. 새로 오는 동포들의 숙소와 일자리를 찾아줬다. 동포들의 집안과 화장실 청소를 해주며, 커튼을 치고 창문에 화분을 놓게 하며, 벽과 담장에 페인트칠을 하도록 격려했다. 그러자 한인에 대한 현지 주민들의 인식이 달라졌다. 한인들이 감귤농장이 많은 LA 인근 리버사이드로 일거리를 찾아 몰려갔다. 일거리를 먼저 차지하려고 스스로 일당을 깎으며 경쟁했다. 도산이 나섰다. 농장주들과 교섭해 동포들에게 일자리를 배정해 노임 하락을 막았다. 도산은 "오렌지 한 개를 따더라도 정성껏 따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고 깨우쳤다. 도산의 노력 덕분에 한인 노동자들은 타국의 최하층 이민노동자이었지만 "조국을 위해 일한다"는 자부심을 갖게 됐다.

1905년 조국으로부터 을사 5조약으로 외교권을 상실하여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도산과 동지들은 대한제국을 대신하여 외교권을 행사하려는 일본 영사관의 관여를 거부하고 공립협회를 통해 동포들을 직접 챙겼다. 동지들은 도산이 국내에 들어가 국권을 되찾는 운동을 벌이도록 강권했다. 1907년초 국내에 들어온 도산은 전국의 지사들의 만나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였다. 을사조약으로 황실과 대신들의 희생정신 즉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없어 망한 대한제국 대신, 비(非)노블레스들의 오블리주 즉, 보통사람들의 희생으로 주권을 되찾아 보통사람들이 주인이 되는 공화국을 세우겠다는 것이었다. 대한‘민국’의 역사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신민회는 전국의 중요한 지사들을 거의 회원으로 흡수해 1910년경 약 800명에 달하는 전국적 규모의 막강한 국권회복 중심 단체가 되었다. 필자는 고등학교 시절 흥사단 아카데미 활동을 하며 도산 선생의 가르침에 접했다. 흥사단은 도산이 장차 독립할 나라의 대들보가 될 청년 지도자들을 키우기 위헤 1913년 미국에서 조직한 단체였다. 흥사단은 청년들에게 삶을 개선하고 발전시키는 실제적인 일을 하라는 무실(務實)· 의미있는 일을 방관하지 말고 힘써 행하라는 역행(力行)·나라에 충성하고 사회를 위한 의로운 일에 용감하라는 충의(忠義)와 용감(勇敢)의 4대 정신을 지도이념으로 했다. 특히 필자는 도산선생께서 "나라에 인재가 없음을 한탄하지 말고 네가 인재되지 못함을 한탄하라"고 하신 가르침에 큰 깨우침을 받았다. 덕분에 필자는 공직생활 30년 동안 누가 시켜서 일을 해 본 적이 없다. 내가 윗사람에게 "이렇게 해야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일을 찾아서 했다. 그러다 보니 어떤 보직을 맡더라도 하나의 표있는 변화나 흔적을 꼭 남기고 떠났다. 흥사단 아카데미 활동은 조국과 민족의 중요성을 깨닫는 계기가 됐다. 특히 공직자로서 나라사랑 정신과 민족의식은 중요하다. 흥사단에서 배운 도산의 가르침은 30년 공직생활 내내 나의 내면에 살아서 공직생활의 정신적 뼈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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