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윤석 을지대학교병원 산부인과 교수
[시선]

요즘 한국 사회는 결정론적 사회 흐름을 보여 주고 있다. 학력(학벌)과 재력(부모)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일명 ‘흙수저 계급론’이 대두된 것. 이는 부와 권력이 대물림되고 있고, 개천에서 용 나는 것이 불가능해 진다는 절망감의 반영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절망감은 지난 40~50년간 산업화 시대의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의 질주가 한계에 봉착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인공지능으로 대표되는 4차 산업혁명 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산업 혁명기적 불안감의 표출이다.

산업화 이전, 농업경제의 가내 수공업형 시대에서는 소량 맞춤의 창의적 선도자(first mover)의 시대였다. 자신의 일에서만큼은 타의추종을 허락하지 않는 실력과 인간적 매력을 가진 사람들이 사회를 이끌었다. 그들은 장인이었으며, 자신의 노력으로 삶을 가꾸고 창조하면서 살았던 자유의지(free will)의 인간이었다.

그러나 산업화 물결 속에서 대량 생산, 대량 소비시대를 맞았고 분업화가 진행되면서 수많은 직업이 양산되고 표준화된 지식과 기술을 빠르게 습득하는 빠른 추격자가 사회 곳곳을 누비게 된다. 결국 필부들의 분업 효율성으로 장인 정신의 선도자들은 사회의 중심에서 밀려난 것이다.

산업화, 대량생산 대량소비 시대의 경쟁의 초점은 주어진 분업을 얼마나 잘 하는지에 맞춰져 있었다. 이것이 ‘스펙’ 경쟁이며, 표준화된 분업을 서로 차지하려는 경쟁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부모의 경제력이고 학벌이었다. 스펙 경쟁에서 승리한 금수저가 상호 네트워크를 만들면서 남의 것을 빠르게 습득하고 분업의 효율성을 극대화 시켰다. 하지만 분업에는 근원적인 문제가 내포되어 있다.

분업에 고도화된 사람들은 자신을 한두 가지 작업에 한정시키면서 이해력과 독창성을 상실한다. 분업의 대가로 자유의지는 고갈되며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일에 매진하는 인간소외 현상이 만들어진다. 이것이 바로 ‘스펙의 종말’, 분업을 국가 부 창출의 동력으로 보았던 아담 스미스가 가장 우려했던 부분이다.

한국과 유럽은 전 인구의 70%가 상속받은 부자다. 하지만 시선을 한국 밖으로 돌려 창의적 경제를 추구하는 국가에서는 실력과 인간적 매력이 부모의 재력과 학벌을 넘어서는 큰 흐름이 만들어지고 있다. 미국, 일본, 중국은 70% 이상이 자수성가형 부자다. 일례로 스티브 잡스와 빌 게이츠는 상대적으로 훌륭하지 못한 학력과 부모의 재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인생 스토리에는 ‘실력’과 ‘매력’이 발산됐다. 새로운 산업 혁명 속에서 스펙은 종말 되고 선도자 시대가 오고 있음을 알려주는 징후다.

스펙 경쟁은 타인을 이길 수 있지만 인공지능과 로봇까지 이길 수는 없다. 분업사회의 일자리는 인공지능 물결에 밀리면서 표준화된 일자리를 차지하려는 스펙 경쟁은 무용지물이 된다. 이 공간은 전혀 다른 가치를 만들어내는 매력의 소유자가 채울 것이다. 아예 표준을 스스로 만들고, 기계가 대체하기 어려운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다. 다시 말해 소량 맞춤의 창의적 선도자(first mover)가 타의추종을 허락하지 않은 실력과 매력으로 사회를 이끌 것이다.

이제 4차 혁명이 도래하고 있다. 이 시점에 스펙과 학벌에 매달리는 것은 조선말기 신학문을 배척하고 구학문인 공자 맹자에 매달리는 것과 같다. 침몰하는 스펙이라는 배를 떠나 창조라는 장인정신으로 갈아탈 때이다. 향후 우리나라도 70% 이상이 자수성가형이어야 한다. 스펙이라는 네트워크를 끊고 시장 친화적 환경을 만들어낼 김영란법이 기대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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