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가 크게 보급되면서 사람들은 라디오의 쇠퇴를 내다봤다. 그러나 라디오는 특성화되면서 TV시청이 어려운 환경을 파고 들어간다. 컴퓨터 자판입력으로 펜을 사용할 일이 줄어들 거라고 예상했는데 더욱 다양하고 고급화되면서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쓰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 전자책이 21세기 들어 기존 종이책 시장의 약 30%를 잠식할 거라는 전문가들의 예상은 빗나갔다. 출판 빙하기가 끝간 데 없이 지속되고 있지만 여전히 종이책은 쏟아져 나오고 e-book의 점유율 역시 기대치를 훨씬 밑돈다.오랜 세월 일상의 한 부분으로 굳어진 생활요소들은
언제 진정국면에 접어들지 알 수 없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전염 사태는 우리 사회를 급격히 위축·냉각시켰다. 가족과 친지, 허물없던 이웃, 별 생각없이 접촉하던 불특정 다수가 염려와 불안, 경계의 대상이 된 것이다. 기약없는 긴장의 일상이 이어진다.그렇다면 이번 기회에 가정과 사무실에서 차분한 마음으로 그동안 겨를이 없었던 성찰의 시간, 나를 찾는 탐색의 계기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홀했던 책읽기를 가까이 할 기회로 활용할만 하다. 근래 SNS 등에서 자주 언급되는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는 이번 사태와 공교롭게
'태산명동 서일필(泰山鳴動 鼠一匹)'이라는 표현에서 처럼 쥐는 대체로 작고 볼품 없으며 상대적으로 균형이 맞지 않는 대상을 지칭한다. 쥐꼬리만한 월급,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 같은 문구 역시 왜소함을 과장하는 용도로 쓰인다. 십이지 동물 중 첫째인 쥐는 다산, 부귀, 낙천, 사교성 그리고 근면과 검소를 상징하기도 한다지만 식량을 축내고 장비나 시설, 무기를 훼손시키는가 하면 전염병을 옮기는 매개체로 각인되기도 하여 이래저래 명쾌하게 정체를 규정하기 어려운 동물의 하나로 꼽힌다.동물의 개성과 이미지를 부각시켜 인간에게 교훈을 깨우치
1990년대 중반 우리사회에서는 한창 환경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면서 이런저런 실천운동이 확산되던 즈음이었다. 당시 이미 선진국 대열에 포함된 싱가포르는 어떨까하고 유심히 관찰했는데 당시만해도 아무런 조치나 매뉴얼 없이 쓰레기를 그냥 섞어서 버리고 방치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좁은 면적에 많은 인구가 밀집하다보니 환경오염에 남다른 의식을 가질 법도 하련만 그때까지는 거의 무방비 상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하기야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50개 주마다 법이 다르지만 지금도 분리배출이나 재활용 개념이 대체로 희박하여 음식물 쓰레기와 일반폐
석 달 뒤 21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정치계에서는 이합집산, 합종연횡, 상호비난과 암투 같은 전근대적인 행태가 재연되고 있다. 20대 국회에 거는 기대가 컸던 만큼 특히 후반기 이른바 동물국회의 참담한 모습은 실망스러웠다. 그럴수록 다른 나라 정치권 특히 북유럽 의회 구성원들의 참신한 모습은 부럽기만 하다. 자전거로 등원하고 이런저런 기득권, 특히 권위에서 자유로운 그들의 가시적인 활동 역시 멋지고 미래지향적이다.21대 총선을 계기로 높고낮은 자리이동 역시 활발해질 것이다. 공천을 주는 대신 어떤 자리를 보장하고 낙선자에 대한
동지가 지났지만 아직 춘분까지는 두 달 반 남짓, 겨울이 지루하게 계속된다. 1월 1일 새해 첫날은 이제 하루 쉬는 정도의 의례적인 기념일로 자리 잡았고 음력설을 쇠어야 본격적으로 2020년이 시작된다는 실물감은 굳건하다. 세밑에 특히 SNS를 통해 다양한 디자인과 문구로 성탄, 새해인사 연하장을 주고받았지만 디지털 콘텐츠가 편리한 만큼 상실되는 아날로그 중량감이 그립다. 예전 우송된 성탄카드나 연하장을 뜯어 적힌 사연을 읽고 그 카드를 거실 장식장이나 사무실 책상위에 한동안 놓아두던 풍습이 사라진 자리의 허전함은 크다.아직 오래
#. (…)이 언덕 저 언덕으로 헛되이 눈길을 옮겨가며/ 남에서 북으로, 해 뜨는 곳에서 해 지는 곳까지/ 이 너른 벌판 곳곳을 살펴보고는/ 나는 중얼거린다 "그 어디에도 행복은 나를 기다리지 않는구나!" (…) / 숲속 나뭇잎이 들판에 떨어지면/ 저녁 바람이 일어 골짜기로 잎새를 휩쓸어 간다/ 그리고 나는, 그 시든 잎사귀와 같으니/ 사나운 폭풍이여 나뭇잎처럼 나도 데려가 다오! - 라마르틴, '고독' 부분지금 읽으면 대단히 표피적인 감상일변도의 서정 토로로 느껴지지만 19세기 초만 해도 전혀 새로운 감수성과 충격적인 표현으로 전
밥상을 앞에 놓고는 아무 말 없이 그저 묵묵히 밥을 먹어야 하는 것이 오랜 세월 우리 사회 가정교육이었다. 대화와 소통을 최고의 테이블 매너로 꼽는 글로벌 에티켓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대목이지만 그 시절에는 나름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너나없이 곤궁하던 시절, 차려놓은 음식이 변변치 않은데 철없는 아이들의 음식투정을 원천봉쇄하기 위해 그러했을 것이고 식사 후 곧바로 일하러 나가려면 밥먹는 시간을 가급적 단축할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 그리하여 최대한 빠른 시간에 식사를 끝낸 까닭에 맛이며 미각은커녕 음식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
예전 정보 유통이 미미하던 시절 남베트남을 월남(越南), 북쪽은 월맹(越盟)으로 불렀다. 1960년대 인기를 끌었던 대중가요에서 ‘남남쪽 섬의 나라 월남의 달밤…’이라는 가사로 매우 잘못된 정보를 유포시켰는데(그 뒤 슬며시 ‘남남쪽 머나먼 나라 월남의…’로 고쳤다) 베트남 성씨(姓氏) 가운데 가장 많은 응우옌(Nguyen)은 구엔으로 발음했다. 구엔 반 티우 당시 월남대통령, 구엔 카오 키 수상 등은 전혀 다른 이름으로 동맹국 한국에 알려진 셈이다. 이런 오해와 장벽은 1975년 베트남 통일 이후 십 수 년 간의 공백을 거쳐 우리와
21세기 급변하는 환경 속에 인간의 능력과 가능성에는 상반된 관점이 존재한다. 날로 다양화되는 사회에서 '통섭'이라는 개념처럼 여러 분야에 두루 정통한 멀티맨의 역량이 우선 꼽힌다. 철학자가 자동차를 디자인하는 현실에서 예전처럼 자기분야에만 집착한다면 도도한 변화의 물결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반면 그럴수록 한 가지 영역을 깊게 파고들어 독자적인 전문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넘쳐나는 정보의 홍수, 날로 넓고 깊어지는 전문지식의 확장 속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분야에 몰두해 비교우위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논리를 제
유럽 여러 나라 국기는 대체로 가로 또는 세로로 3등분돼 각기 다른 색으로 구성됐다. 이 구조를 바탕으로 약간의 변형이 가해졌는데 유럽의 식민지배를 받았던 아프리카 국가들도 이런 형태의 국기를 사용하는 나라가 적지 않다. 그래서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국기 디자인이 됐다.우리 태극기는 그런 의미에서 돋보인다. 깊은 철학적 함의는 물론이고 안정감있고 여러 형태로 응용이 가능한 확장성까지 내포해 국력신장과 함께 앞으로 보다 다양해질 태극기 활용 국가 마케팅이 기대된다.일본 국기는 우선 자극적이다. 눈에 띄는 본능적 감각으로는 아마
노천카페와 옥외식당은 상상만으로도 낭만적 정취를 불러일으키며 호기심을 끈다. 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길거리 카페의 탁 트인 분위기를 선망하기 때문이다. 정부는 지난주 가게 앞이나 옥상에서 음식을 팔 수 있도록 규제를 대폭 완화한다고 발표했다. 내년 하반기부터라고 하는데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여론은 대체로 긍정보다는 우려 쪽으로 기우는 듯하다. 경기불황 타개책인 동시에 자영업자에게 혜택을 주는 조치라는데 과연 이 시책이 업자와 소비자 모두에게 이로울지 여론 수렴 과정이 필요할 듯하다, 지금도 서울 잠실 석촌호수 카페골목이나 을지로
넘쳐나는 건강정보, 의학상식은 도움이 되는 반면 적지 않은 경우 혼란과 갈등을 유발한다. 같은 현상을 놓고도 엇갈린 주장을 펴는가 하면 체질, 신체 상태 그리고 생활습관에 따라 각기 다른 경우를 도외시하고 일괄적으로 단정을 내리기 때문에 이런 혼동은 가중된다. 가령 탄수화물이 몸에 미치는 영향을 알리는 경우 비만을 야기하는 주범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인체 밸런스와 영양관리를 위해 꼭 필요한 필수성분임을 강조하는 기사나 포스팅을 접하게 된다. 인간심리는 대체로 부정적이거나 위험을 알리는 쪽으로 무게를 두며 신뢰하는 편이어서 탄수화물 기
며칠 전 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하며 이례적으로 가석방이 허용될 수 없음을 강조했다. 사형선고 대안으로 강력한 징벌 의지를 밝힌 셈인데 실질적 강제효과는 없어서 선언적 수사(修辭)차원에 머무는 느낌이다. 가석방 결정은 법무부 소관이어서 사법부의 의지와는 별개이므로 실질적 사형 폐지국이 된 이후 사회적 공분을 일으킨 범죄에 대한 단죄가 미흡하다는 여론이 높다.사형제 폐지에 관련해 프랑스 작가 빅토르 위고(1802~1885)가 작품으로, 행동으로 전 생애를 통해 표출한 대안 제시는 그런 의미에서 눈여겨볼 만하다. 법률상으로는 아직 사형
학부와 대학원에서 전공강의를 수강했던 학생들이 통틀어 약 1500명 쯤 되는 듯 싶다. 인터넷 강의도 오래했는데 이 경우는 수강생들과 직접대면과 교류가 어려운 탓에 예외로 한다. 1500명 중에는 지금도 소식을 주고받으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주례를 선 경우도 적지 않지만 이름과 특성, 사회진출 이후의 근황 정도만 알고 있는 졸업생이 대부분이다. 이중 더러는 메일 등을 보내오면서 제자 아무개라고 적기도 하는데 이럴 때마다 어색하고 쑥스럽다. 몸에 맞지 않는 남의 옷을 입은 것처럼 거북하기도 하다. '제자'가 있으면 '스승'
서양에서는 젊은 사람이 나이 많은 사람의 이름을 스스럼없이 부르곤 한다. 우리 정서로서는 부럽기도 하고 조금 이질적이기도 한 대목이다. 서양언어에도 존댓말과 높임 표현이 있다지만 우리말의 다양하고 섬세한 어법에 비할 수 있을까. '…해라'에서부터 '…하시옵소서'까지 갖가지 상황에 활용되는 다채로운 어미 쓰임새는 우리 언어의 장점으로 꼽힌다. 그런데 막상 연장자를 부르는 호칭에서는 다양성의 폭은 줄어든다. 집안에서의 촌수나 사회생활 직함을 부르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리 마땅치 않다. 흔한 '○○○씨'는 이제는 좀 무례해 보인다. 그래
올해 43세인 아비 아머드 알리 에티오피아 총리는 작년도 공동수상자인 콩고민주공화국 드니 무퀘게에 이어 2년 연속 노벨 평화상울 받는 아프리카 출신이 됐다. 그러고 보니 2010년 이후 근래 10년 동안 노벨 평화상 수상자는 2012년 유럽연합(EU)과 2017년 핵무기폐지국제운동(ICAN) 등 3개 단체를 제외하고 모두 미국, 유럽 등의 강대국이 아닌 개발도상국가나 아시아권 인사가 수상하는 기록을 세우게 됐다. 노벨상의 위상과 평가가 나날이 달라지고 있다지만 '평화'라는 의미가 주는 무게감은 아직 여전하다.노벨상 가운
법무장관 임명을 둘러싼 논란과 갈등이 증폭되면서 몇 달 째 나라가 어수선하다. 민주사회에서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표출하고 나아가 행동으로 구체화하는 과정은 자연스러운 현상이기도 하다. 이런 단계를 거치며 학습효과를 통해 보다 성숙한 민주사회가 뿌리내릴 것이라는 기대도 있다. 그러나 이즈음 우리 현실은 대단히 소모적인 정쟁 차원으로 접어들어 파행이 지속되고 있다. 이 와중에 정작 우리가 관심을 보이고 주목해야 할 여러 대상과 현안에 소홀해지는 것은 아닐까. 이런 사안 중의 하나가 제100회 전국체육대회일 텐데 국민적 스포츠 이
19세기 중반 이후 가속화된 과학기술 발달에 힘입어 당시 유럽 여러 나라는 보다 편리해진 삶의 여유와 문명의 혜택을 만끽하고 있었다. 일상의 즐거움은 나날이 커져갔고 프랑스의 경우 이 무렵은 황금시대 (벨 에포크)라는 이름을 얻을 정도였다.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박람회를 기념하는 조형물로 에펠탑을 세우는가 하면 미국과 서로 원조임을 다투는 영화의 보급도 이즈음이었다.이런 삶의 열락, 일상 깊숙하게 스며든 물질문명의 안락함에 도취해 있던 가운데 돌출한 것이 이른바 드레퓌스 사건이다. 평화로워 보였던 사회의 일락에 결정적인 일격을 가하면
피부로 느끼기는 어렵지만 국민소득 3만 달러가 넘었다고 하니 우리사회는 이미 오래 전 이른바 '감성사회'로 진입한 셈이다. 그동안 IMF사태며 이런저런 격랑 속에서 잠시라도 평온함을 누리기 힘들었던 저간의 상황으로 우리가 감성사회의 구성원임을 그다지 체감하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감성사회. 간략히 말하자면 종전 '아톰형' 소비자에서 '캔디형' 소비자로 전환된 가운데 여러 징후와 특징으로 볼 때 오래전부터 감성사회는 깊숙이 진행 중이다. 과거에는 품질이 믿을만하고 가격이 저렴하다면 상품과 서비스를 구매하는 첫 조건을 만족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