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꺼진간판 아래개가 쓰러져 있다 풀 먹인 옷처럼 정맥이 곧고 푸르다어제와 같은 자리에서 눈 뜨는 오후를두려워하며쓴 입맛을 다시는 개피에 젖어담배를 무는 개촌스러운 음악을 틀고 골목을 휘청거리듯사이비와 다단계에 빠진 개기소유예로 풀려난 개안개 낀고가도로에 멀어져가는 구급차 사이렌처럼 희박한개가바람을 등지고 누워 있을 때누구도 찾지 않았다그러나곧 올 것을 알았다어질러진 머리를북쪽으로 두고 잠들며볕이 들기를기다렸다20대 젊은 시인의 감수성은 하나의 장면에 집약되어 있다. 불 꺼진 간판 아래 쓰러져 있는 개. 개의 몸에 드러난 정맥은 곧
내 안에는 한 그루의 나무가 자라고 있다아버지가 이름을 그렇게 지어 주셨다농사를 짓는 이에겐나무가 필요하다며지금 나는 농사 대신 시를 짓고 있지만내 가슴 어딘가엔 나무의 숨결이 있다그것이 나를 움직여시를 쓰게 한다인정을 알게 하고 시절을 느끼게 하는나무의 푸른 가슴, 나무의 따뜻한 체온그 혼의 등불을 따라내 생生이 걸어간다시인의 내면에는 아버지가 심어주신 나무가 자라고 있다. 농사를 짓는 이에게 나무가 필요하다며 아버지가 이름 지어 주셨다는데. 지금 시인은 농사 대신 시를 쓰고 있다. 밭고랑 일구는 대신 시를 쓰며 시인의 가슴 어딘
얼마나 무겁고 큰 것을 짊어지고 가기에저토록 느리게 기어오르는 걸까시작과 끝이 보이지 않으니가늠조차 할 수 없으니그건 고뇌일 거다그래, 지상의 고뇌란 고뇌는 모두 끌어모아등 위에 짊어지고나무 꼭대기에 올려놓으려 하는 거다다시는 지상의 그 누구에게도돌아가지 못하도록아예 큰 구름 위에붙들어 매어 두기 위해 기어오르는 거다나무늘보는 왜 나무 위로 기어오르는 것일까. 이 단순한 질문에 시인의 상상력은 돌파구를 찾는다. 느린 동작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우리 친구 나무늘보. 그러나 내가 2016년 캘리포니아 와일드 애니멀에 가서 보았던 나무
장강은 동쪽으로 굽이쳐 흐르며세찬 물결로 천고의 인물들 다 쓸어가 버렸네.옛 성의 서쪽에는사람들 말하길 삼국의 주유가 싸웠던 적벽이 있다네.어지러이 널린 바위 구름 뚫을 기세로 솟아있고성난 파도는 강기슭 할퀴며 달려들어천 겹의 눈덩이 쌓아올리듯이 강산 한 폭의 그림 같으나한때 영웅호걸 그 얼마나 많았던가!아득히 멀리 주유 살던 때 생각하니소교와 막 혼인하고영웅의 자태가 드높았으리.깃털 부채와 비단 두건 쓰고 담소하던 중적군의 배는 재가 되어버렸지.이 마음 혼백 되어 고향 땅 노닐 때정 많던 그대여 날 보고 웃겠지.일찍 희어진 머리
스티로폼 밥을 먹고스티로폼 성경을 읽고스티로폼 칼에 찔리기 전스티로폼 아이를 낳았다스티로폼 은행에는 스티로폼 돈이 빼곡하고스티로폼 실험실에는 스티로폼 유전자들이 흘러다니고스티로폼 학교에는 스티로폼 선생님들 걸려 있고스티로폼 늪에는 스티로폼 개구리들 삑삑거리고스티로폼 모텔에는 스티로폼 텍스들이 바쁘다스티로폼 골목 안스티로폼 소주를 마신 사내들이 스티로폼을 게워내고스티로폼 아내들이 스티로폼 생리대를 버리고스티로폼 국회에는 스티로폼 생산 예산이 표류하고스티로폼 스키장에는 소복한 스티로폼 눈 내리는여기는 스티로폼 공화국‘공화국’이라는 말은
골목길 담장 아래여자가 앉아봄나물을 다듬는다참새랑 쫑알쫑알 노는늦둥이로 둔 막내가하냥 사랑스러워괜스레아이 이름 한번 불러보면서갓 깬 솜병아리처럼삐약삐약거리는 햇살이하냥 간지러워해살해살 웃으면서저녁 반찬으로 먹을봄나물을 다듬는다미나리 향기 나는 봄날에저 여자 옆에 앉아나도 봄나물을 다듬고 싶다내 마음도 가지런히 다듬고 싶다다소 성급한 마음인지 몰라도 우리는 벌써 이 시의 봄날 속으로 풍덩 빠져버리고 만다. 아지랑이 오르는 봄을 깨우는 나물은 냉이와 씀바귀, 꽃다지와 달래, 질경이 등이 있다. 나물 다듬는 여자와 조금 떨어져 참새와 늦
새들의 가슴을 밟고나뭇잎은 진다허공의 벼랑을 타고새들이 날아간 후,또 하나의 허공이 열리고그곳을 따라서나뭇잎은 날아간다허공을 열어보니나뭇잎이 쌓여 있다새들이 날아간 쪽으로나뭇가지는,창을 연다이 시에는 이미지 허공이 등장하고 있다. 이때의 허공은 일차적으로 우리에게 존재의 터를 제공하는 의미가 있다. 허공은 무(無)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무 그 자체로서 유(有)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허공은 무로서 유를 안고 있는 형상인 셈이다. 이는 인식의 전환으로서 역설적 표현이기도 하다. 또한 허공은 이중적이기도 한데, 텅 비어 있으면서 꽉
하늘을 지우고산을 반 지우고내려오는 눈이창에서 나를 들여다보네안에 엄마 있나창에 매달려 방안을 들여다보던 아이들이호주머니에 손을 넣고선득선득한 목덜미를 움추리면서밑으로 밑으로떨어져 내려가네우리 엄마는 중환자실에서액체를 몸에 넣고액체를 몸에서 빼내는수많은 줄과 바늘에 꽂혀2주일째 누워 계시네물 한 방울 엄마 입에 넣어 줄 수도손 한번 잡아드릴 수도 없네이렇게 이별할 수는 없는데60여 년 날마다 함께 일어나 밥 먹고함께 자던 엄마를이렇게 보지도 못하고 보낼 수는 없는데겨울의 스산한 날씨에 아파트 흰 색상은 싸늘함과 단절감을 고도로 응축
창 열고 바라보는 봄 바다는 고양이,저 혼자 부딪치며 살아온 목숨여서오늘도 조선 매화를 파도 위에 그린다활짝 핀 공작 날개 흉내 낸 여름 바다,어느 문중 휘감은 대나무 뿌리처럼푸르고 깊은 가문을 댓잎으로 상감한다발굽도 닳아버려 혼자 우는 가을 바다,멀리멀리 떠나가는 비단 같은 노을길을갈매기 수평선 멀리 지평선을 물고 간다폭설을 삼켜버린 캄캄한 겨울 바다,천길 어둠 밀어내고 동살로 여는 아침부스스 잠 깬 고라니 동백숲에 숨어든다올해의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한 시조다. 고완수 시인. 보령 출생. 이미 시를 써서 몇권의 시집을 낸 바
선운사 동백 꽃망울모지락스럽게 입술 깨물며아직 단꿈 젖어 있어두터운 외투걸치기도 벗기도 애매한 이 계절에그끄제 내린 목화송이 같은 함박눈벌써 자국 없이 물크러져 질척이네부푼 동백꽃망울 살포시 귀 기울이면겨울바람만 핥던 버석대는 줄기마다땅속 깊이 퍼 올리는 물소리자분자분 들려오네달포 지나면깊은 잠 깨운 봄꽃 군단 따라화사하고 아린 동백꽃미친 불길 휩싸여 벙싯 피어나겠지꽃그늘 타고 떠오르는 어느 느낌씨딱 그랬지눈부신 절정에서 울켝울컥 생피 토하며마지막 유서 쓰듯탐스럽게 피워 올려툭툭 목을 꺾는 동백꽃도내 사랑도그토록쓰린 가슴도 눈물겹게
나무는 하느님 계신먼 하늘을 알고 있다말 대신 잎을 피워기도의 손짓을 하고꽃 피워 하느님 전에헌화를 올려 드린다나무는 하느님 계신먼 푸름을 알고 있다기도의 메시지로온 이파리 태운 뒤에훌, 훌, 훌, 하느님 전에빈 몸뚱이 보여 드린다나무는 하느님 계신그 하늘을 믿고 있다눈보라 설한풍 속에기도 소리 날려 보내고나이테 한 금 서약을제 몸속에 새겨 드린다어쩌면 나무는 성자가 몸을 바꾸어 우리 곁에 와 머무는 것인지 모른다. 그의 눈매, 그의 어깨, 그의 손짓을 보면 우리는 언제나 평안을 얻고 있지 않은가. 우람한 나무를 올려다보면 우리는
네가 열어두고 간 창문으로 눈 내리는 장면을 본다 어떤 남자와 여자가 서 있고 다투는 소리를 듣는다창가엔 어떤 발자국도 남아있지 않았다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친근한 곳에서 가끔 위험한 곳에서먹고 자고 만나는 일들이 떠오르고창밖으로사람이 지나간다 사람이 지나가고 사람이 멈춘다 멈춘 사람과 눈이 마주친다 사람과 마주친 느낌을 느낀다 너와 마주친 느낌을 느끼는데가깝고 친근한 곳은 가끔 위험해지는 걸까그렇게 생각하면 먹고 자고 헤어지는 일들이 이해되기도 하고눈 쌓인 거리를 걷다가 문득방안을 기웃거린 이는 내 생활이 어느 장르에 가깝다고
난 오늘부터 내 맘대로 할 거야누가 뭐라 해도 안 달릴 거야안 달린다고!앞바퀴 너,내 말 잘 알아들었지?야, 너 내 말 안 듣고 어디 가?난 안 달릴 거라고!안 달린대도!어!어!네가 가니까 나도 자꾸 따라가잖아 !에이, 모르겠다오늘도 신나게 달리는 거야2024년을 시작하고 어느새 넷째 주로 접어들었어요. 모두들 연초의 계획은 무사하신가요. 아니면 삼 일 지나 이미 모든 게 사라져 버렸는지요. 새해에는 어제의 반란으로 시작해 보겠다며 큰 소리 치지만 조만간 그 의지 거품처럼 수그러들지요. 그리곤 어느새 새해도 지난해와 비슷한 상태로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하늘을 닮아 가는 것청초하게 피어 있는 들꽃에마음 설레임을 보내고달빛이 쉬어 가고새가 둥지 트는 넓은 가슴이 하늘 향하는외로움, 괴로움, 서러움, 환희저녁노을과 함께 서랍에 고이 담아 두자언제 올지 모르는 새벽의 여명이조용히 문을 두드릴 때까지그래도나는 또 다시 나목으로 깨어나가슴 뛰는 푸른 노래 부르리솔잎의 향기에 사랑의 전설 새기면서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단지 지나간 세월을 쌓는 게 아니다. 그것은 하늘을 닮는다는 것으로 한 차원 승화된 가치로 제시하고 있다. 시인은 살아가며 만나게 되는 외로움과 괴로움, 서러
낚싯대 하나 들고제주 바다를 여러 날 거닐었다수시로 입질이 왔다질펀히 내려앉은 바위이름 없이 산 것들 줄지어 낚는다널뛰는 파도를 품었다 놓느라 울퉁불퉁한데움푹 팬 가슴엔햇살과 바람과 눈물이 머물러 있다허공에 힘껏 줄을 던져깎아지른 절벽을 낚는다정을 쪼듯 내리치는 물살에 새겨진 문신상처가 깊을수록지느러미의 골이 빛난다덜컥 입질이 왔다 이번엔 정말 크고 센 놈이다머리를 하늘로 치켜올리고 기둥처럼 떼로 서 있는 놈하늘이 같이 끌려 온다낚싯대가 휘청인다함께 쉽게 사는 법은 없어서세로로 그어놓은 금이 햇살에 도드라진다진정한 낚시란 무엇을 말
아무도 모르겠지만몰랐겠지만나는 물을 기르고 있다.키우거나 지키는 것이 아니라아주 조금씩 자랄 때도 있고또 줄어들 때도 있지만 분명,나는 물을 기르고 있다.어느 날엔가 언니는물 한 대접을 사이에 두고 웃다가또 몰래 삼켜버리는 것을 보았다.내가 언니의 나이가 되었을 때목련꽃 숭어리째 떨어지듯 물이 목에서철철 흘러넘치는 날이 많았다.제법 주름이 늘자 인생 뭐 별거 있냐고물목의 수위 조절도 가능하게 되었다.그러니까, 자두에 새콤하게 고인갓 딴 오이의 와작거리는딱 그만큼의 물비온 뒤 땅 밟았을 때 물렁한 물기,딱 그만큼그 정도면 충분하다.우
마른 목련 나무에눈 내린다눈은 나리고봄꽃이 그리운직박구리 두 마리부리로 눈꽃을 턴다지는 꽃잎처럼땅으로 떨어지는 눈송이들나무는 온몸에조막막 한 눈집들을 가득 매단 채가만히 서 있다저 묵언默言의 겨울가슴 깊숙이봄의 새끼들이 부화하고 있나직박구리 떠나간 자리에빈속처럼눈이 내린다눈이 덮인 세상에서도 풍경 속으로 움트는 온기가 있어 겨울과 연말의 어수선함 줄어든다. 마른 목련 나무 가파른 가지 위로 내려앉은 눈. 그것은 비워서 비로소 차오르는 생의 역설이 아닌지. 가지에 내린 직박구리 두 마리는 필시 한 쌍일 것이다. 그 둘 사이에 사랑이
누군가와 사랑하는 것은때로 그림자밟기 놀이 같은 일당신과 내가 앞서거니 뒤서거니차례를 바꾸어가며 술래가 되어서로 그림자를 밟으러 쫓기도 하고내 그림자를 밟히지 않으려고길고 서늘한 나무 그늘 밑에 오래 숨었다가해를 등지고 뒷모습을 보이며 달아나는 일아주 맑은 날 밝은 눈으로 보아야그림자를 볼 수 있지만많은 날들이 흐리고 눈은 자꾸 어두워지지당신과 내가 서로 맴도는 사이날이 기울어가고 어스름이 밀려오면가엾게도 두 그림자 모두 지워지거나술래가 그만!을 외칠지도 모르는 일그러나 내 그림자를 밟히고 나서야비로소 알게 되었다내 것을 먼저 내어
비가 오지 않아 마디가 짧아진 오이지난밤 내린 비로 지네발 덩굴손이 자라고구부렸던 순이 고개를 든다옆으로만 퍼지던 오이 마디가 밤새 자랐다덩굴손이 허공을 타고 길게 올라야오이도 길쭉하게 주렁주렁 달린다배밭 포도밭은 또 어떻구한시름 놓은 거지나무도 사람도사십 밀리 비에 이렇게 달라지다니논에 물이 차고 개울물이 흐르고이제 살판난 거야저수지까지 물이 괴면 좋으련만하늘에 또 맡기는 수밖에하하 웃으며 담배 한 대 물고호박밭으로 향하는 해찬 형님노란 오이꽃 토마토꽃이 옆에서해맑은 얼굴로 웃는다어느새 올해도 채 이십 일 남지 않았다. 매년 이맘
그는 경찰보다 먼저사고 현장에 도착하는 사람하고많은 날 늘어지게 하품만 해대다가누군가 중앙 분리대를 넘어서는 순간앞뒤 안 가리고 무조건 달려가는 사람전두엽에 타인의 불행을 좇는네비게이션을 장착한 듯했지날마다 피비린내를 끌어모으던비 내리는 토요일 밤의 잠복 근무자가속 페달을 밟던 오른발이 꺾인 채견인차에 거꾸로 매달려 가는시작은 준비 다음에 오는 어떤 것그러나 영원히 알 수 없는 미지길 위에서 머뭇거린 날들은 모두 평일이었지전조등은 언제나 불안의 방향으로 켜져 있다차를 몰고 갈 때 가끔 견인차가 재빠르게 달려가는 장면을 목격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