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고록영

동지가 지났지만 아직 춘분까지는 두 달 반 남짓, 겨울이 지루하게 계속된다. 1월 1일 새해 첫날은 이제 하루 쉬는 정도의 의례적인 기념일로 자리 잡았고 음력설을 쇠어야 본격적으로 2020년이 시작된다는 실물감은 굳건하다. 세밑에 특히 SNS를 통해 다양한 디자인과 문구로 성탄, 새해인사 연하장을 주고받았지만 디지털 콘텐츠가 편리한 만큼 상실되는 아날로그 중량감이 그립다. 예전 우송된 성탄카드나 연하장을 뜯어 적힌 사연을 읽고 그 카드를 거실 장식장이나 사무실 책상위에 한동안 놓아두던 풍습이 사라진 자리의 허전함은 크다.

아직 오래 계속될 올 겨울을 따뜻하게 나기 위한 음악이 떠오른다. '겨울 나그네' 연가곡 24편은 바로 이즈음 무언지 모를 헛헛함과 이런저런 생각에 가득 찬 머리와 가슴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정화시켜줄 가장 적절한 명곡으로 손색이 없다. 흔히 '겨울 나그네'로 통칭되지만 여기서는 개인을 지칭하기보다 그가 느끼면서 밟아가는 파란만장한 겨울 여행의 과정을 좇아간다는 의미로서 '겨울 여정(旅程)'으로 부르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24개 연가곡으로 이뤄져 있지만 그 각각의 제목과 담긴 이야기는 하나의 독립된 스토리텔링을 이루는 가운데 스물 네 편이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지금부터 200년 전 독일의 신산했던 정치사회 환경 속에서 예민한 주인공이 느꼈던 실존적 불안과 시대에 대한 불편이 빌헬름 뮐러의 감성적이면서도 암호화된 메시지에 실려 프란츠 슈베르트의 서정적 멜로디로 녹아 흐른다.

밤 인사, 풍향계, 얼어붙은 눈물…로 시작해서 마지막 곡, 거리의 악사로 끝나지만 겨울 여정은 여기서 마감되지 않는다. 겨울 나그네는 춥고 황량한 거리에서 맨발로 손풍금을 돌리는 노인 악사를 향해 함께 동반자가 되어도 되겠는가를 물으며 자신의 노래에 반주를 청하고 있다. 아직 어딘가로 여행을 계속할 듯한 나그네, 그가 경험하는 자연과 세상, 인간의 모습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정제되고 증폭하는 감성과 사유가 음악을 듣는 동안 줄곧 우리에게 고스란히 이입되어 체화되는 듯싶다. <한남대 프랑스어문학전공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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