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에밀 졸라 거리의 졸라 상(橡). 사진 = 이춘건
파리 에밀 졸라 거리의 졸라 상(像). 사진 = 이춘건

19세기 중반 이후 가속화된 과학기술 발달에 힘입어 당시 유럽 여러 나라는 보다 편리해진 삶의 여유와 문명의 혜택을 만끽하고 있었다. 일상의 즐거움은 나날이 커져갔고 프랑스의 경우 이 무렵은 황금시대 (벨 에포크)라는 이름을 얻을 정도였다.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박람회를 기념하는 조형물로 에펠탑을 세우는가 하면 미국과 서로 원조임을 다투는 영화의 보급도 이즈음이었다.

이런 삶의 열락, 일상 깊숙하게 스며든 물질문명의 안락함에 도취해 있던 가운데 돌출한 것이 이른바 드레퓌스 사건이다. 평화로워 보였던 사회의 일락에 결정적인 일격을 가하면서 프랑스는 온통 갈등과 분열의 소용돌이로 휩쓸려 들어간다. 유태인 출신 알프레드 드레퓌스 대위의 억울함과 군부의 음모를 규탄하는 측과 국가반역죄로 처단함이 옳다는 진영 간의 대립과 공방은 격렬했다. 우아하고 예의를 갖추어 시작한 모임이나 파티 등에서도 화제가 드레퓌스에 이르면 급기야 편이 완전히 갈라져 폭력이 난무하는 육탄전으로 비화돼 결국 난장판에 이르는 등 초토화된 국민심성과 대립양상은 황금시대에 어두운 그림자를 남겼다.

이 와중에 그 시대 지성인들은 정의와 진실을 밝히며 드레퓌스 대위가 국면전환과 군부 내 갈등을 덮기 위한 희생양이 되고 있음을 천명하는 가열찬 활동에 나섰다. 에밀 졸라를 중심으로 하는 그룹에서는 격렬한 담론과 열정적인 행동으로 진실과 정의 그리고 한 개인의 억울함을 넘어 인간에게 주어진 본질적인 자유는 그 어떤 명분으로도 훼손될 수 없음을 소리높이 외쳤다.

결국 드레퓌스 대위의 무고함이 밝혀지면서 복권이 이뤄졌고 자본가와 교회를 비롯한 당시 기득권 사회의 위상은 크게 위축됐다. 가톨릭이 국교였던 프랑스는 20세기 초에 이르러 정교(政敎)분리를 선언하기에 이르는 등 기존질서 개편이 이루어졌지만 열렬하고 활동적인 지성그룹의 리더 에밀 졸라는 1902년 자택 굴뚝 연기가 역류하는 의문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역사는 반복하면서 그때마다 새로운 교훈을 일깨워 준다고 했던가. 서양과 동양 그리고 백수십 년이라는 시·공의 격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사회에 '데자뷔'로 어른거리는 분열과 갈등의 징후를 본다. 성숙한 민주사회로 한걸음 더 나아가는 진통이기를 바라면서 모두에게 치명적이고 비생산적인 대립과 반목의 조기종식을 고대한다. <한남대 프랑스어문학전공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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