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망에 찬 도시의 그 불빛 어디에도 나는 없다" 조용필 '킬리만자로의 표범' 中

#. (…)이 언덕 저 언덕으로 헛되이 눈길을 옮겨가며/ 남에서 북으로, 해 뜨는 곳에서 해 지는 곳까지/ 이 너른 벌판 곳곳을 살펴보고는/ 나는 중얼거린다 "그 어디에도 행복은 나를 기다리지 않는구나!" (…) / 숲속 나뭇잎이 들판에 떨어지면/ 저녁 바람이 일어 골짜기로 잎새를 휩쓸어 간다/ 그리고 나는, 그 시든 잎사귀와 같으니/ 사나운 폭풍이여 나뭇잎처럼 나도 데려가 다오! - 라마르틴, '고독' 부분

지금 읽으면 대단히 표피적인 감상일변도의 서정 토로로 느껴지지만 19세기 초만 해도 전혀 새로운 감수성과 충격적인 표현으로 전율과 충격을 받는 독자들이 많았다. 18세기 계몽사상 아래 철학과 비판이 우세하던 시기에는 꿈꿀 수 없었던 낭만적 감성의 대담한 표현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고독이 일상에 자리 잡게 됐다.

#. 그 후 2세기 급격한 산업화와 사회변동, 감성의 충격이 거듭되면서 외로움의 강도와 절실성은 높아만 갔다. 19세기 낭만주의 감성 같은 정신적, 형이상학적인 고립감, 고독은 훨씬 현실적으로 실존 깊숙하게 스며들었다. 산업사회, 물질의 득세, 소득 불균형 그리고 인간관계의 단절과 갈등 같은 여러 요인이 고독과 외로움의 강도를 바꿔 놓은 셈이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 이런 외로움이 야기하는 정신적·물질적 손실과 무엇보다도 인명이 희생되는 고독의 위력은 걷잡을 수 없는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다. 복지와 사회안전망이 나름 확충되고 여러 측면에서 대안을 확충하고 있으나 외로움의 위력, 그 후유증의 확산 속도에 비해 턱없이 늦은 현실이다.

#. 영국에서는 이미 '외로움 담당 장관'을 둬 국가차원에서 고독과의 전쟁, 고독사와 외로움이 야기하는 온갖 개인적, 사회적 손실을 최소화 하는데 힘쓰고 있다 한다. 남의 나라 일, 해외토픽감이 아니다. 우리도 더 늦기 전에 전담 부서를 지정해 체계적인 콘트롤 타워를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사람과 사람의 관심, 다른 이의 외로움을 나의 고독으로 받아들이고 관심과 공감, 소통을 구체화하는 의식전환일 것이다. 나와 가족, 친지가 웃고 즐기는 동안 누군가가 소리 없이 고통 속에 삶의 쇠잔을 향한다는 것을 더 명확하게 인식해야 할 올 세밑이다. <한남대 프랑스어문학전공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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