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신팔균·임수명 부부
신팔균 비밀결사 대동청년당 활동
부친 고향 진천에 ‘보명학교’ 세워
임수명 서신·비밀문서 전달 지원
남편 총상 사망 소식에 음독 자결
진천군, 순국 100주년 연극 예정
[충청투데이 이용민 기자] 20대 꽃같은 청춘 남녀가 환자와 간호사로 만났다. 둘은 서로를 의지해 조국 독립이라는 이상을 향해 날아오른다. 적군의 총탄에 한쪽의 날개가 꺾이자 다른 한쪽은 스스로 날개를 접는다.
충북 진천을 연고로 한 독립운동가 신팔균·임수명 부부는 비익조를 연상케 한다. ▶관련기사 16면
설화 속 상상의 새 비익조는 하나의 눈과 날개만을 지니고 있어 한 쌍이 돼야만 서로에게 의지하여 날 수 있다. 암수 중 한쪽이 죽으면 나머지 한쪽도 따라 죽는다고 한다.
국가보훈부 ‘2024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임수명(任壽命, 1894~1924) 동지는 18세인 1912년 서울의 한 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했고 이 무렵 독립운동가 신팔균(申八均, 1882~1924)장군을 만났다.
당시 신팔균 장군은 1909년 조직된 비밀결사 대동청년당 활동을 하고 있었다. 임수명 동지는 일본경찰의 눈을 피해 병원에 숨어있던 그를 도와주며 인연을 맺게 된다. 두 사람의 결혼 시점은 1914년 5월 10일로 기록돼 있다.
신팔균 장군은 서울 중구 정동에서 태어났지만 사실상 충북 진천 인물이다. 그의 평산 신씨 가문의 근거지가 진천이기 때문이다. 조부인 신헌은 병조판서를, 부친 신석희는 한성부판윤을 지내 서울에서 근무했지만 가문과 왕래가 빈번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1902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한 신팔균 장군은 육군 참위(오늘날의 소위)로 임관해 복무하다 1907년 일제에 의해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부친의 고향인 진천군 이곡면(현 이월면) 노원리로 내려가 보명학교를 세운다. 보명초에서 비롯된 이월초등학교 교정에는 신팔균 장군 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결혼 후 신팔균 장군은 만주로 떠났다. 임수명 동지는 개성에 머물며, 남편의 동지들에게 서신과 비밀문서를 전달하는 등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한국 근대사에서 여성들은 1907년 국채보상운동을 시작으로 3·1운동에서 큰 역할을 담당했지만 여성 스스로 단체를 조직해 계몽운동과 항일운동 등이 본격화된 건 1920년대 들어서다.
당시 사회상을 볼 때 임수명 동지 역시 나름의 방식으로 가장 치열하게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이다. 병원에 숨어든 독립운동가를 감싸안고 독립군 가족으로 살아가는 건 목숨을 걸어야 가능한 일이다.
1921년 무렵부터는 신팔균 장군이 잠시 국내에 들어왔을 때 함께 베이징으로 망명해 만주 등을 오가는 힘든 삶을 이어가며 독립운동을 뒷받침했다.
신팔균 장군은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활동하면서 독립군을 양성했고, 1922년 설림된 대한통의부에서 의용군 사령관과 군사위원장을 맡는다.
이후 1924년 7월 무관학교 생도와 독립군의 합동군사훈련 중 일제가 사주한 중국인 마적단의 기습 공격에 총상을 입고 사망했다.
임수명 동지는 8월 충격받을 것을 걱정한 주변의 권유에 만삭의 몸으로 귀국했다. 10월 남편의 전사 소식을 듣게 됐고 병 중이었던 셋째 아들마저 사망하자 갓난아기와 함께 음독 자결했다.
이들 부부는 현재 국립 서울현충원에 합장돼 있다. 정부는 신팔균 선생에게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아내 임수명 동지에게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진천에서 날아오른 비익조의 독립정신은 무대에서 재현될 전망이다. 진천군은 임수명 동지 순국 100주년을 기념해 오는 11월 22일 화랑관에서 연극을 공연할 예정이다.
진천=이용민 기자 lympus@cctoday.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