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문화신문

방글라데시는 작은 나라이지만 전통적인 부모-자녀 관계를 가지고 있다. 양육에 있어서 전통적인 규범을 따르며, 대부분의 아이들은 부모와 함께 대가족으로 구성된 환경에서 자란다. 가족은 오랫동안 방글라데시 사회의 핵심이었다. 가장 흔한 가족 단위는 ‘BARI’로 조부모, 성인이 된 자녀와 배우자, 손자녀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 때때로 사촌, 조카도 함께 포함된다. 가족 구성원들끼리는 강한 유대감을 가진다. 방글라데시에는 부모, 자녀 사이와 관련된 효 이야기가 많다.

대표적으로 무굴제국과 바야지드 이야기가 있다.

◆무굴제국 속 부모사랑 이야기

황제 바부르(1483 - 1530)는 무굴 제국의 창시자였다. 그의 아들 후마윤은 중병에 걸렸고 의사들은 도저히 회복될 가망이 없다고 말했다. 바부르 황제는 후마윤이 후계자가 된다면 제국에 영광을 가져다주고 백성들에게 평화와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바부르는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아들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신에게 간청했다. 결국 후마윤은 회복되었고 바부르 황제가 대신 병을 얻게 되었다. 아들의 목숨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것이다. 후마윤은 그의 아버지가 기대했던 대로 올바른 황제가 되었다.

◆바야지드의 효 이야기

바야지드 보스타미(804?874)는 어렸을 때 작은 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어느 날 밤 편찮으신 어머니가 옆에서 공부를 하고 있던 바야지드에게 물 한 잔을 부탁했다. 그는 어두운 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혼자 외출하여 서둘러 물을 구해왔다. 어머니 곁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다시 잠들어 있었다. 바야지드는 물 한 잔을 손에 들고 어머니 옆에 서서 어머니가 일어나실 때까지 기다렸다. 아침에 일어난 어머니는 침대 옆에서 물 한 잔을 들고 서 있는 바야지드를 보고 매우 놀라며, 자신을 깨우지 않고 기다린 아들의 특별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바야지드를 끌어안고 그가 미래에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기도했다. 후에 어머니의 기도가 받아들여졌는지 바야지드는 유명하고 존경 받는 학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방글라데시의 역사와 문화 속에는 가족사랑과 효의 정신이 나타나며, 현대에도 다양한 문화 관습을 통해 효를 이어가고 있다.

일례로 방글라데시에서는 출산 전 대부분의 여성들이 어머니의 집으로 찾아간다. 아기가 태어나면 출산 소식을 남편에게 전하게 되는데, 5일 또는 7일 후에 남편과 친척들이 찾아와 태어난 아기를 위한 잔치와 이발 의식을 진행한다. 이 때 사악한 것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아기의 이마와 발에 검은 화장으로 작게 표시를 한다.

또한 부모는 어릴 때부터 자녀 교육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인다. 부모는 평생 모은 돈의 대부분을 자녀 교육을 위한 사립대학이나 학원비에 지출하며, 자녀가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보장하기 위해 노력한다. 부모는 어떠한 보상을 바라지 않고 자녀의 행복한 삶을 위해 노력한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자녀는 부모에게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다. 또한 자녀와 손주들이 집에서 부모님을 돌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부분의 젊은 남녀들은 가족의 선택에 따라 결혼을 한다. 부모는 자녀가 적합한 결혼 상대를 선택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현대시대에 들어서 부모와 자녀 관계에 다양한 갈등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부모와 자녀는 서로 다른 두 세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의 정신적인 성장과 자녀가 분리된 세대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들이 존재한다. 부모와 자녀의 상호 작용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자녀의 관점과 의견을 충분히 존중하지 않는 것이다. 최근 방글라데시는 다양한 공중보건교육 캠페인을 통해 양육 관행을 점차 개선해나가고 있다. 점점 더 많은 부모가 현 시대에 맞는 가족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세계화와 함께 방글라데시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부모와 자녀의 사랑과 효 정신을 새로운 방법으로 계속해서 이어가야 할 것이다.

국방대학교 수탁장교 (방글라데시 대령) 파루크 탄짐(FARUQ TANZIM)

전국 효 문화유산 탐방-문충사 (대전광역시 동구 동부로 73번길 44)

문충사는 일제에 의해 강제로 체결된 을사조약과 한일합방을 통탄해하며 자결한 송병선(1836~1905)과 송병순(1839~1912) 형제의 위패와 영정을 모시고 제사드리는 사당이다.

송병선은 우암 송시열 선생의 9대손으로 19세기 말 외세가 물밀 듯이 들어와 나라의 앞날이 어려워지자 『근사속록』을 간행하였다. 또한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었을 때에는 고종에게 조약 파기와 을사 5적을 처단할 것을 진언하기도 했다. 고종을 다시 만나려다가 일본 헌병들에게 체포되자 상소문을 올리고 동생 송병순과 함께 음독 자결하였다.

송병선의 평소 효에 대한 생각을 알 수 있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어느 날 제자들이 까다로운 질문을 하였다. "만약 시아버지와 남편이 동시에 물을 빠졌다고 할 때, 누구를 먼저 구해야 맞습니까?"이에 송병선은 "시아버지를 먼저 구하고, 다음에 남편을 구해야 도리에 맞느니라. 시아버지를 먼저 구함으로써 효를 실천하고, 다음에 남편을 구하고 물에 빠져 죽어야 열을 실천할 수 있기에 효와 열을 함께 다하는 길이 되느니라."라고 말했다. 이처럼 송병선의 평소 가치관은 효가 최우선임을 확인할 수 있다.


[효툰] 꿈빛이와 떠나는 효문화 여행
-한국효문화진흥원 소개 3편-
글·그림 : 이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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