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충규 대전 대덕구청장
요즘 지속적으로 언론에 등장하는 갑질에 이어 반대로 을질에 대한 여론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갑(甲)과 을(乙)’이 도대체 얼마나 멀고도 먼 사이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십간(十干)인‘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는 자연과 인간에 대해 핵심을 뽑아 놓은 단어라 할 수 있는데 동양철학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특히 갑과 을이라는 단어는 예전부터 계약서 등과 같은 서류에 많이 사용하고 있었으나 현재는 다른 용어로 대체되고 있다. 이는 갑과 을이 가진 의미를 서열, 우위 등으로 사용하기 때문인데 어찌 보면 단순한 순서의 나열로 의미를 부여했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단순함이란 없다. 대부분이 복잡하고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삶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고대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고 정의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갑과 을에 대해 좀 더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있는 갑질과 을질도 이러한 관점에서 다시 조명해 보아야 한다.
갑(甲)은 십간 중 첫 번째로 시작하고 싹이 트는 것을 의미하며 나무(Wood)의 성향이 강하다. 이에 반해 을(乙)은 ‘둘째, 새(Bird), 굽다’라는 의미를 가지며 꽃(Flower)의 성향을 가진다. 하지만 이 두 단어는 모두 공통적으로 목(木)의 기운이 강하다고 한다. 그래서 자상함과 부드러움, 개척과 호기심의 특징을 가지게 된다. 결국 갑과 을은 모두 같은 부류이며 현저한 차이가 나는 대상은 아니다.
대부분이 상사와 부하 직원간에 갑질과 을질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이는 사실 서로가 같은 공간과 시간을 살아가는 동료라는 사실에 대해 인지하지 못하고 무의식중에 고정관념인 갑과 을에 갇혀 있는지 모른다.
십간의 내용으로 볼 때 상사는 자상함과 부드러움으로 부하직원을 대하여야 하며 부하직원은 개척과 호기심을 통해 더 발전된 방향을 소통하며 함께 나아가야 함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이 세대 차이라는 개념에서 발생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세대 차이는 서로에게 이해의 문제이며 경험의 문제이다. 20대의 생각을 50대는 이해할 수 없고, 나이가 들어 50대가 되어야 예전에 들었던 말과 상황이 이해가 되는 것처럼 이것은 머리로만 이해한다고 하는 것일 뿐 마음으로 진정한 이해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반대로 50대도 20대의 생각을 진정으로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것을 억지로 이해하라고 한들 우리 사회의 갑질과 을질의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앞에서 언급한 같은 부류의 입장에서 나무의 꽃을 피우기 위해 함께 노력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내가 심판의 위치에서 양측의 입장을 들어보고 판단을 내린다고 생각할 때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에는 자의적인 면이 강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바로 나이와 상황이 공정한 입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갑질과 을질의 심판은 정말 어려운 것 같다. 오히려 심판을 받으려는 양쪽이 너무 고단하고 힘든 길을 가는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명백한 것은 당연히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하지만 애매한 사건이나 작고 소소한 부분까지 강제로 드러내고 파헤치는 일들이 결국 영원히 서로에게 상처만 남기는 일처럼 보여 답답할 뿐이다.
갑질과 을질은 함께하는 세상이 아닌 나만의 세계로 가는 외로운 길이다. 혼자서 세상과 맞서 나아가려는 오기(傲氣)로 잘못 흘러 갈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에게 배려하고 신뢰하는 관계로 나아가는 사회적인 분위기 조성에 힘써야 하고, 이러한 부분에 대한 교육을 지속적으로 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단방향 교육이 아닌 서로의 감정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풀어갈 수 있는 상호교환적인 방식이 절실하다. 이제는 우리도 갑질과 을질이 아닌 ‘우리’로 거듭나는 사회로 진일보하기 위해 서로에 대한 관심과 소통을 생활처럼 이어갔으면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