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아물지 않는 보도연맹사건 상처
<글 싣는 순서>
上. 충북 실태
下. 피해회복 하세월

上. 충북 실태
1950년 6∼7월 연행 후 집단학살 자행
억울한 희생 부지기수… 시신 수습 못해
진실 밝히기엔 진실화해委 규모 한계
과거사정리법 개정 조사기간 연장 필요

청주지방법원 현판[연합뉴스TV 제공
청주지방법원 현판[연합뉴스TV 제공

[충청투데이 김영재 기자] 올해 초봄에 청주지법에서 눈길을 끄는 판결이 나왔다. 보도연맹사건 희생자 유족에 대한 국가 배상 판단이다. 전국적으로 비슷한 판결이 잇따르고 있지만 희생자 유족의 한(恨)을 위로하기에는 부족함이 많다. 특히 보도연맹사건은 제주 4·3사건이나 5·18민주화운동과 달리 피해회복 지원을 위한 법이 없어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해야 한다. 충청투데이는 충북지역 보도연맹사건을 중심으로 당시 피해 실태와 피해회복을 위한 입법 필요성을 짚어본다. <편집자 주>

보도연맹의 정식명칭은 국민보도연맹이다. 1948년 국가보안법 시행으로 좌익 전향자를 보호하고 지도한다는 명분으로, 이들을 가입시켜 만든 단체다. 1950년 6·25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북한에 동조할 우려가 있는 남한의 좌익세력을 뿌리 뽑는다는 이승만 정부방침에 따라 군경(軍警)의 무차별 즉결처분으로 많은 보도연맹원이 희생됐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 등의 기록을 보면 그해 6월 경기도와 강원도에서 시작된 보도연맹원 학살은 7월에 전국으로 확산됐다. 전국적으로 최소 6만명에서 많게는 30만명의 민간인 학살이 자행됐다고 한다.

충북에서는 5800여명으로 추정되지만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를 통해 확인된 보도연맹학살 관련 희생자는 890여명에 불과하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 결과에 따르면 충북에서 보도연맹원 학살은 1950년 6∼7월에 집중 발생했다.

그해 7월 옥천에서 32명, 7월 5일 충주에서 38명, 6∼7월 청주와 청원에서 94명, 7월 초∼21일 영동에서 93명, 7월 초 괴산에서 44명, 6월 30일∼7월 8일 충주·음성·진천에서 10명, 7월 10∼11일 청원과 진천에서 54명, 6월 말∼7월 20일 보은에서 40명, 6월말∼7월 초 괴산과 청원에서 40명 등이 희생됐다,

1949년 9월∼1951년 3월 음성과 제천에서도 12명 등이 군경에 의해 살해됐다.

보도연맹 희생자 중에서는 보도연맹에 가입했다는 누명을 쓴 이들이 상당하다. 동네사람 여러 명과 대화하다가 느닷없이 들이닥친 군경에 의해 끌려가 총살된 경우도 허다하다. 상중(喪中)에 끌려가 총살당한 사례도 있다. 군경이 할당량을 채우려 무모한 학살을 자행했다는 얘기가 있다. 억울한 희생자가 부지기수라는 뜻과 상통한다.

경찰서에 연행돼 총살된 후 시신을 찾을 수 없는 희생자가 많다. 이들의 제삿날은 대부분 경찰에 연행된 날이다. 보도연맹 희생자들의 자식들은 아버지가 빨갱이라는 이유로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고초를 겪어야했다.

이런 이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진실규명의 길은 험난하다.

우선 유족 등의 신청이 있어야 하고, 진실규명 결정이 내려져야 한다.

이후 방대한 관련 자료수집과 조사, 검증, 유해 발굴 등 진실화해위원회의 피나는 노력이 밑거름돼 진실규명 결과가 나오게 된다.

보도연맹 등 6·25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학살사건은 70여년 전에 발생한 탓에 자료수집과 증언 채록 등의 어려움으로 진실규명에 한계가 있다고 한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직 규모는 항일독립운동, 해외동포사,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 권위주의 통치 때에 일어났던 중대한 인권침해,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 등 과중한 업무를 수행하기엔 턱없이 작다.

조사기간이 올해 5월까지 연장됐음에도 처리대상사건 2만 871건 중 조사 중인 게 5200건에 육박할 정도다.

단 한 건일지라도 억울한 희생의 명예회복을 위한 진실 규명을 위해선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기본법 개정을 통해 조사기간을 재연장해야 한다.

김영재 기자 memo340@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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