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근 단양군수
필자의 가까운 조상은 지금은 북한 지역인 강원도 통천군에 살아 오셨다. 그러다가 200여년 전 5대조 할아버지가 ‘소백산 밑에 3재(三災 : 기근, 전쟁, 질병)를 피해 대를 이을 수 있는 명당이 있다’는 정감록을 믿고 단양으로 이주하셨다. 입단양조(入丹陽祖)인 것이다.
주변에는 이렇게 선조들이 정감록을 믿고 단양으로 이주해 오늘에 이르게 된 사람들이 의외로 많음에 놀랐다.
유교사상이 지배한 조선시대에는 대(代)가 끊기는 것을 가장 큰 불효라 여겼다. 대를 잇지 못하면 ‘죽어 조상님 뵐 면목이 없다’고 여겨 시앗을 들이더라도 대를 잇고자 했다.
그러나 아들을 낳더라도 어려서 병으로 또는 굶어 죽거나 난리에 희생되어, 즉 3재로 인해 대가 끊기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이를 피하기 위한 간절함으로 정감록을 믿은 것 같다.
정감록은 조선시대 임진왜란 전 저자불명의 예언서다. 주역 등 각종 비기(秘記)를 집대성하고, 음양오행설, 풍수지리설, 도교 사상을 섞어 조선 왕조가 망한 뒤 정씨 왕조가 생기고 계룡산으로 도읍을 옮긴다는 등 허황되고 현실 부정적인 내용이 담겼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금서(禁書)로 정하고 갖고 있기만 해도 처벌했지만 민간에서 은밀하게 전승되어 수백년 동안 인기를 누려왔다. 수많은 사람이 손으로 몰래 베끼면서 가감이 이뤄져 이본(異本)이 60여종에 이른다고 한다.
정감록에서는 ‘10승지(十勝地)’라 하여 3재를 당하지 않고 ‘난세에 몸을 보전할 수 있는 열 곳’을 꼽고 있다.
그 곳이 어디인지 명확히 기록한 원문은 드물다. 위치를 기록했다고 하더라도 시대와 판본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소백산 두 물길 사이에 있다’ 또는 ‘단춘’(丹春 : 단양 영춘),‘‘단양의 영춘’으로 기록한 판본이 많이 전해온다.
10승지는 모두 한강 이남 지역이었는데 주로 백두대간에서 갈라진 산자락이었다. 그 중에서도 소백산은 가장 중시됐다. 그래서 지금의 북한 지역 백성들은 대를 잇고자 하는 마음에서 필자의 조상처럼 10승지를 찾아 내려와 정착한 집안이 많았다는 것으로 보인다.
당파싸움과 세도정치, 탐관오리들의 수탈로 힘들게 살면서 조정을 원망하는 백성들은 나라가 바뀌고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를 기대하면서 정감록을 믿고 싶었을 것이다.
이러한 정감록의 10승지 예언은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 때에도 영향력을 미쳤다. 특히 6·25 전쟁의 1·4후퇴시 피난길에 나선 북한지역 주민중 일부는 정감록 10승지의 예언을 믿고 난세에 안전하게 살 수 있는 단양을 비롯한 10승지를 피난처로 이동했다.
그 중에 인삼으로 유명한 개성 지역의 주민들이 풍기 지역에 많이 정착하면서 풍기의 인삼이 더 유명하게 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한편 우리 단양 지방의 사투리는 북한 사투리와 비슷하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낱말보다는 억양에서 그렇다고 한다. 왜 그럴까? 북한 지역과 접경지도 아닌데 말이다.
필자는 아마도 위에서 얘기한 정감록 10승지의 영향으로 조선시대부터 특히 1·4후퇴시 북한 사람들이 많이 정착한 영향이 컸지 않았을까 싶다.
게다가 3도 접경지라서 충청도, 경상도, 강원도 사투리가 섞인 특수성까지 더해져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로 굳어진 것 같다.
그래서 단양군에서는 작년 5월 소백산 철쭉제의 부대행사로 ‘단양 사투리 경연대회’를 열었다.
90여세의 할머니까지 평범한 우리 이웃 사람들이 출연해 웃음과 즐거움을 만끽한 무대였다는 점에서 아주 보람 있었다.
사투리는 창피하거나 부끄러운 게 아니다. 대중 매체의 발달과 높은 교육 수준으로 몇 십 년 더 지나면 이 정겨운 사투리도 더 이상 들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를 잘 전승 보존함은 오늘을 사는 우리 세대의 소명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