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진 충북본사 선임기자

‘politcian’은 앙면성을 지닌다.

통상 ‘정치인’으로 해석되지만, 부정적 의미를 내포한 ‘정치꾼’이나 ‘정상배(政商輩)’라는 뜻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영어권에선 ‘politcian’보다는 존경받는 정치인이란 의미인 ‘statesman’으로 불리는 걸 자긍심으로 여긴다.

한국정치를 주도하는 국회, 범위를 좁혀 지방자치를 이끌어가는 자치단체장과 지방의회 의원 중 ‘statesman’은 과연 얼마나 될까.

단언컨대, 극히 드물다. 애써 비판보다는 평가를 일일이 찾아내 정당성을 부여해야만 나타나는 신기루 같은 존재일 터.

정치꾼은 다음 선거만 생각하고(영국 경제학자 콜린 클라크), 자신을 위해 나라를 이용한다(프랑스 전 대통령 조르주 퐁피두)는 교훈을 앞세우지 않아도 정치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만 허락된 소명과 헌신의 명예다.

정치꾼들의 공통점은 오만하고 교활하다는 점이다. 자신의 야욕을 이루기 위해 민심을 조작하고 왜곡한다. 사진 촬영하듯 매일 변하는 민심의 기류를 정지된 시점으로 편집해놓곤 내가 가는 길이 국민의 명령이요, 내가 하는 일이 민심을 받드는 일이라며.

지난 총선에서 오만보다 불민(不敏)을 경고했더니, 제 세상인 양 쥐어주지도 않은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는 야당이나 아직도 불민이 무엇인지조차 각성하지 못한 채 집안싸움이나 벌이는 여당 모두 마찬가지다.

정치는 본디 사회적 갈등과 대립을 조율해 사회통합과 국가발전을 실현하는 일일진대, 여야를 막론하고 그들의 정치는 적대감만 가득찬 맹목적인 투쟁 의지다.

자시지벽(自是之癖·자기의 뜻이 늘 옳은 줄로만 빋는 버릇)일 뿐.

이를 목도하는 많은 국민들은 비록 침묵하지만 아프고 슬프다. 그래서 눈물을 흘린다. 힘겹다고.

인도의 정치지도자 자와할랄 네루는 "정치는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라고 강조했지만, 우리의 눈물은 누가 닦아줄 것인지.

정치를 통해 이를 기대하긴 어렵다. 침묵 대신 저항하고 나서야 하는 이유다. 살기 위해선 저항해야 한다.

정치꾼들이 스스로 부여한 특권을 없애고, 정치를 헌신과 봉사가 아닌 권력으로 오인하는 그들의 오만과 교활을 바로잡아야 한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주권과 책무이기 때문이다. 입으로만 대리인을 자임하는 그들이 주인의 뜻을 거슬러 주인 행세를 하려 하면 혹독하게 가르쳐 깨닫게 해야 한다.

‘자유와 권리는 딱 네가 저항한 만큼만 주어진다’는 체 게바라의 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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